▲ 하 태 영 목사
세월호 참사를 우리 사회 반면교사로 삼는 게 이 시점에서 옳은 일인지 망설여진다. 지금도 사랑하는 이의 시신조차 건지지 못하여, 야속한 바다를 응시하며 망연자실해 있는 이들을 생각하면 죄스런 마음이 앞서서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세월호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상징성이 너무도 크기에, ‘세월호’로 일컫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세월호는 우리 사회 욕망의 과적에 다름 아니다. 배의 균형을 무시하고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가도록 증축했음에도, 더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싣기 위해 배의 복원력에 필수인 평형수까지 빼낸 어리석은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익을 위한 일이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우리 사회의 무지, 어리석음, 냉혹함이 여기에 이르렀다. 지금 이 시간도 수많은 세월호들이 각처에서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이 허사만은 아닐 것이다.

과적한 화물이 욕망이라면, 평형수는 욕망의 과적이 초래할 불행을 제어하는 장치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의, 평화, 생명, 분배, 비판적 언론, 규제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팽창한 욕망은 무한대로 허용하면서, 이를 규제할 평형수는 빼내버린 사회. 경제를 위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어야 한다며 모든 규제를 뽑아내야 할 암 덩어리로 여긴 게 오늘의 대한민국이고, 개개인의 자화상이다. 정의와 공정한 분배에 대한 요구는 종북 좌파몰이로, 정부에 대한 책임추궁은 선동꾼으로, 촛불을 들면 불순세력으로 매도하는 대한민국이니 어찌 과적한 욕망을 제어할 사회적 양심이 작동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어떤가? ‘믿음’의 이름으로 포장한 욕망이 춤추는 게 오늘의 한국교회다. 소위 믿음으로 뜨거운 교회는 욕망의 불길이 뜨거운 교회이다. 한국교회에서, ‘신앙’은 자신이 믿는 대상과 관련된 것이라면, ‘믿음’은 자신이 바라는 것에 대한 비이성적 열정이다. 한국교회는 신앙은 부실하고, 믿음은 뜨겁다. 욕망을 내려놓기 위해 절제와 비움의 평형수를 더 채워야 할 교회가, 욕망을 더 쌓도록 절제의 평형수를 빼버리는 걸 믿음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사회가 욕망을 과적하여 위태로운 지경인 터에, 이에 질세라 교회까지 욕망을 과적하고 있으니 교회 역시 이미 기울어진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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