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오후 플라타너스
마른 잎들이 발길에 차인다
그 푸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사람 사는 일도
한 번뿐인 목숨이라
돌이킬 수 없으나
내겐 영혼을 주신 당신이 있어
영원한 삶이 있지 않은가

눈 감으면 내 안에
찾아오는 당신
오래오래 기다려주는 모습에서
늘 찾아가는 길은 어둡고 멀다

사랑가 용서로 가득한
그 너른 가슴 속에
소담한 둥지를 틀 수만 있다면
내 날갯짓 멈추지 않으련만

아직도 저 멀리 가물거리는
하늘 길 찾을 수 없으니……

▲ 정 재 영 장로
둥지라는 제목에서 화자는 새라는 조류임을 알 수 있다. 조류란 쉴 수 있는 집인 둥지를 땅과 하늘 사이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 짓는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중간자 존재임을 밝히려는 의도적 배치다. 즉 새란 천상적 존재와 지상적 존재 사이에 놓여있는 불안한 중간자의 심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천상적 가치를 지향하는, 그러나 여전히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실존임을 보여주려는 형상화 작업이다. 

 이런 서로 상반된 관념은 매 연마다 나온다. 1연은 생명을 잃어버린 낙엽, 그러나 사라진 푸른빛의 과거. 2연에서는 한 번뿐인 목숨과 영원한 삶. 3연에서는 찾아오는 당신과 찾아가는 화자의 길. 4연에서는 둥지속의 안식과 멈출 수 없는 날갯짓의 불안. 마지막 연에서는 보일 듯 가물거리지만 찾을 수 없는 길.

 이런 이중성의 배치는 작품 전체의 구조에서도 복합적으로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2연에서 눈감으면 찾아오나, 마지막 연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영원의 둥지인 안식처는 현세의 삶 속에서는 불가능함을 동시적으로 제시하려 함이다. 즉 있는 듯 없는 것,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찾아질 수 없는 곳은 끊임없이 시도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이려는 언어로 만든 미학적 형상화 작업이다. 즉 인간이란 둥지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있는 나뭇가지에 존재하는 사물인 것처럼 실존 양상도 그렇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이런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의 배치는 융합시의 특징적 구성이다. 융합시란 이질적이고 상반적인 것을 핵융합 시키듯 미학적 기전 안에서 용융(melting)시키려는 창작기법이다. 이런 상반된 관념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것은 20세기 영미 비평학의 주류인 엘리엇 등이 주장한 신비평(new criticism)을 이어 탈-포스트모더니즘(후기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신모더니즘)을 시도하려는 창작비평론이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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