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먹지 않지만 바다 고기는 좋아해요.
개는 사랑하지만 가죽 구두를 신죠.
우유는 마시지 않지만 아이스크림은 좋아해요.
반딧불이는 아름답지만 모기는 잡아 죽여요.
숲을 사랑하지만 집을 지어요.
돼지고긴 먹지 않지만 고사 때 돼지머리 앞에서 절을 하죠.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지만 잊혀지긴 싫죠.
소박하지만 부유하고
부유하지만 다를 것도 없네요.

▲ 정 재 영 장로
이 작품은 인터넷에 나온 글을 실은 것이다. 글쓴이가 유명인이라서 싣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없다.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도 잘 모른다. 

 모순덩어리라는 단어가 눈에 띠어 수사학적 관심이 끌렸다. 물론 그가 올린 글이 외형상으로 시의 형태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가 무엇인지, 시는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좋은 예가 되어서 따왔다. 

 내용은 있는 그대로 읽으면 된다. 그러나 모순덩어리가 주는 암시성이나 함축성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삶을 통해 사랑과 미움, 밝음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를 알게 된 사실을 수상록(隨想錄)처럼 쓰면서도 시의 생명인 비유(metaphor)를 빌어 자기 세계를 드러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대시의 특징인 역설과 아이러니의 기법을 차용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로 이 글은 시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문학의 방법론을 사용하면 미학적 울림이 더 크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이 모순덩어리다. 모순이란 한자의 의미대로 창과 방패다. 즉 상이하고 이질적인 의미를 말한다. 이런 상반적인 이미지를 동원하면 남극이나 북극 또는 남녀와 같은 음양의 오묘처럼 의미하거나 상징하는 용량이 많아진다. 이것을 양극화작업이라 하는데, 이 기법은 17세기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의 특징으로, 신비평학자들까지 그 중요성을 강조해온 창작론이다. 이질적이고 상반적인 비유를 이해하려면 강제적인 통합적 감수성이라는 힘이 필요하다. 이것을 엘리엇이 ‘폭력적 결합’이라고 하였다. 최종적인 의도는  ‘순수한 통징(痛懲)’이라는 문학목적론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감동이라는 울림이며, 곧 내재율이다.

이 글처럼 대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통해 깨달은 사실에 미학적 요구를 충족시켜주면 그 울림이 확장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존재라는 철학적 주제까지 미학적 담론으로 만든 예술적 완성도에 놀라움을 표한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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