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이라도 있어 행복합니다.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다가
길을 나섭니다.
 
돌과 돌이 끝없이 잇대어 돌담을 끌고 갑니다.
돌담은 문을 굳게 닫은 그대로
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새로운 아침으로 통하고 있었지요.
 
돌담을 더듬던 눈에 눈물이 고여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은 부끄럽게도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자꾸 이 길을 걷는 것은,
다만,
잃어버린 나를 찾는 까닭입니다.
 
▲ 정 재 영 장로
이 작품은 상징어를 사용하고 있다. 종교적 담론은 현세적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서 상징어를 차용하는 것이 수사법으로 적절하다. 넓은 의미에서 비유란 직접 설명이 불가능하여 숨겨진 진리를 말하는 경우다, 그래서 그것과 비슷한 사물을 빗대서 말함으로 암시적이나 포괄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는 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주로 서정시에 표현된 문예사조이다. 자연주의나 고답파(高踏派)에 대해서, 주관을 강조하고 정조(情調)를 상징화하여 표현하는 것을 주안(主眼)으로 했다.’
이처럼 상징은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 주관적인 깨달음을 말할 때 긴요한 수사법임을 알게 해준다.
첫 연에서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우선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에서 시작한다. 상실한 물건이 자신에게 소속된 장소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더듬다’는 것도 그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2연에서는 돌담과 아침과 저녁이라는 말이 나온다. 끝이 없는 돌담으로 막혀 있는 현실, 그것에다 아침과 저녁으로 이어진 시공(時空)을 동시에 보여주어 상실을 찾아 나가는 시간과 장소로부터 해결로 향하는 막혀있는 출입구를 보여주려 함이다.
3연에서는 화자의 eke혀 있는 상태와 달리, 하늘이라는 넓은 세계를 제시함으로 상실한 자아와 반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다. 이것은 자아를 부끄럽게 하는, 본질을 상실한 인간자아의 새로운 자각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 돌담 안에 갇혀 있는 화자는 돌담 밖에 있는 지향점을 끊임없이 찾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풀 한포기 없는 현실은 암담하다. 담 밖에 있는 본질로 돌아가려는 심리를 보여준다.
상실과 회복이라는 것을 돌 담 안과 하늘 즉 담 안과 밖의 설정도 융합시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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