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사람들은 인생의 전부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믿고 의존하는 것에만 매달려서 먹고 살아가는 것에 매달려 있다. 가정에서, 전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혹은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 안에서, 혹은 직장이나 공장 안에서, 모두들 나름대로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보다 나은 생활, 더 좋은 것과 더 바람직한 목표를 성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전통과 관습에 젖어서 바쁜 행실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실력에 대한 과신과 자만심에 가득 차서, 자기가 듣고 생각하대로 살아가고자 할 뿐,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헛된 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신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죄수들이 감옥에 잡혀 들어간 후에야, 피눈물을 흘리면서 반성하는 것과 유사하다. 순간적으로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인죄를 범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과오를 왜 그때에 좀 더 깨우치지 못했던가를 나중에 가서야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죄 값을 치루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듭 반복되는 자신의 판단 착오와 행동의 실수와 말의 오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만을 믿고 붙잡으려 한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어떤 것이 참된 진리인지 분명히 구분치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인생이다. 마침내, 하나님을 거역한 죄 값을 치르게 된다.

“길”이라는 낱말에는 수단, 방법, 방편 등의 뜻이 들어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열린다. 구원의 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교단이나 교리의 전통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기도 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구원의 길을 사람이 선행과 공로를 채워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은혜인데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성취해 낸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개신교회에서는 성경에 따라서 오직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의 공로만을 의지한다.  

최근에 미국 침례교회 신학자 레인보우는  「구원의 길: 칭의 안에서 기독교인의 순종」 에서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 양쪽 모두에 대해 인간의 선행과 노력을 바르게 취급하라고 주장한다. 절충주의 입장에 선 레인보우는 칭의와 성화와의 관련성을 다루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기에 로마 가톨릭에는 칭의론이 왜곡되었음을 비판한다. 하지만 개신교인들을 향해서 무분별한 반율법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인간의 행동과 노력을 결코 축소시키지 않는다는 입장을 바울서신과 야고보서, 루터와 칼빈의 저술에 근거해서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절충주의는 오히려 모호한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열어 놓은 구원의 길은  과연 어떤 길인가? 예수님은 세상의 성공이나, 행복이나, 물질적인 축복을 얻는 길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면, 이 땅위에서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출세와 권세와 영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의 절실한 기도와 절박한 소원을 들어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적인 인기와 성공을 보증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은 다 실망하고 말았다. 예수님의 길은 세상의 방식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영원한 진리 가운데 인도함을 받아 살다가 영생을 누리게 되는 길이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이 제시하고 열어놓으신 길을 따라가는 방법은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약 2:1)라고 하였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믿음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용서의 방법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돌아가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2.2. 구원으로의 초대

예수를 믿고 죄를 고백하여 사함을 얻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전도와 권유와 권고의 초청을 통하여 전인류에게 알려진다. 전도라는 것은 사람의 입으로 수고를 통해서 실행하는 것이기에 매우 더디고 느린 방법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채택하실 수 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강요와 강압을 사용하진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무시당하고 외면당하신다. 천재지변을 일으키거나, 가공할만한 자연현상을 통해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구원을 호소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더디고 어리석게 보이는 방법을 택하신다.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을 보내셔서 사람의 말로 귀에 들려주시고, 그들을 건져내셨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행 2:21)고 말씀하셨다. 듣지 못한 자를 어떻게 고백하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누군가 전파해야만 한다. 전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달려가야 가능한 일이다. 보냄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증거하고 전파할 것인가. 그래서 먼저 들은 사람들 중에서 선발하여서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특수하게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백성들에게 나가서 하나님을 대표하도록 하였다. 사람의 수준에서 같은 이해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증거하도록 하셨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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