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자 들뜬 부활의 기쁨을
우리들은 하늘의 창을 닫아 듣지 못했다

가을 그리고 긴 겨우내
죽은 듯 인기척 없이 잠들었던 알뿌리들이
살아날 가망이라곤 없는 비틀린 것들까지도
실날같은 생명줄 품고 가슴조이며
설 잠 깨어나 생명 환희의 개가를 부른다
사람들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줄기에서 피어나는 꽃들이야 핏줄이나 있다지만
다 마른 알뿌리는 어떤 기적인가
깡마른 가슴에 탯줄 지어 숨 헐떡이는
숨 헐떡이게 하는 그 손길은 대체 누구일까

 

 

▲ 정 재 영 장로

첫 연에서 생명의 기적은 부활에 있음을 서둘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늘의 창’을 닫아 부활의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감동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이란 마음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무뎌졌음을 말하고자 한다. 즉 영적 난청이나, 청각장애를 말한다.

 2연에서도 자연은 봄마다 부활하는 감격과 기쁨을 누리고 있으나 정작 인간은 아무도 그것을 듣기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행의 ‘사람들은 아무도’란 표현은 역설적이다. 왜냐면 이것을 듣고 있는 시인자체가 사람이다. 즉 시인 이외는 모두 못 듣는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시인의 위치를 암묵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시인이란 우주의 소리를 듣는 사제와 같은 것이다. 시인이란 인간과 우주와의 중간 존재로, 시인의 감수성을 통해 부활의 소리를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그 감격을 토로하고 있다. 마른 알뿌리는 인간의 노년을 은유한다. 바로 노시인의 부활의 믿음과 감격을 엿볼 수 있다. 그런 부활의 진리를 듣는 노시인의 마음은 ‘헐떡이는’ 감격이다. 그러나 그런 ‘헐떡이게 하는’ 주체인 신적 존재를 뻔히 알고도 모른 체 하면서 질문으로 끝을 맺는다. 소위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 동원이다. 즉 독자에게 당신도 알지 않느냐는 동감을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융합시론의 긍정적인 면을 여러 곳에서 차용한 작품이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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