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한국교회는 공교회로서의 사회적 공공성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것은 교회가 폐쇄적인 은둔자들의 집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지역사회에 속한 교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지역주민들의 삶에 동참하지를 못하고 있다는데 쉽게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주민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주민들의 삶속에서 한국교회를 이끌던 진보진영(에큐메니칼진영)의 교회들도, 군사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운동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공교회로서의 역할을 상실,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교회들이 서구의 재정적 지원이 중단되고, 국내 대형교단과 대형교회에 재정적 지원을 기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인 한국교회협의회는 서구교회의 재정적 지원이 중단되면서, 수구적인 부유한 교회와 보수적인 교회의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교회협은 정관을 바꾸면서까지 세계교회협의회과 NCC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사를 의장에 영입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운동의 주도권을 이들에게 넘겨주었다. 사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의 분열은 기독교전쟁을 예고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양측은 끊임없이 법적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은 물론, 분열과 갈등을 연속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선교초기부터 서구교회가 이식해 놓은 교파주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목회에 그대로 적용, 교인들의 정신과 신앙을 오염시키고 있다. 예언, 통변, 영서, 방언, 치유, 이적, 기적 등은 이미 미아리 고개의 점쟁이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특히 믿음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로 계산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여기에다 목소리를 높여가며, 기도하는 사람만이 믿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이비 교인, 나이론 신자로 치부되고 있다.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라는 말들이 나돌고 있는 것이다. 돈을 받고 면죄부를 준 중세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초기 한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함께 성장해 왔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교회가 짧은 기간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배고픈 백성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며,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세상을 위해서 일을 했다.

한국교회가 헌금의 액수로 믿음을 가름하고, 하나님나라의 척도로 환산하면서, 가난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부자들로 채워졌다. 70=80년대 하나님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민중과 더불어 일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민중교회들도, 오염된 기성교회를 그대로 닮아하고 있다. 이제 교회는 노동자도, 농민도, 부량자도, 거지도 떠나 최상위계층만이 남게 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현재의 상황을 바로 인식하지를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거리를 안식처로 삼아 배회하는 노숙자와 청소년들을 돌봐줄 능력을 상실했다. 반면 교인들의 주머니를 털어 바벨탑을 쌓는데만 급급하고 있다. 또한 이단논쟁을 벌여 교인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의 십자가탑은 세상의 등불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 소금의 맛도 잃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권싸움에 혈안이 되어 분열과 갈등을 일삼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한국교회는 텅빈 강정으로 변해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목회자들은 돈을 쫓아다니고, 교인들은 물질만능주의에 길들여지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을 둘러싸고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는가 하면, 교회당을 팔아치우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목회자들은 교회내부싸움을 중단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성서로 돌아가자고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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