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오늘도 <따뜻한 하루>로 출발한다. 오늘 아침 이메일에 <따뜻한 하루>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담은 한편의 시를 올려주었다.  

“아버지는 코를 골고/아이들은 쌔근쌔근/잠으로 빠져들지만//어머니는 졸린 눈 비비며/바느질에 길쌈까지//아침을 재촉하는/새벽닭이 홰를 치기도 전에//어머니는 그보다도 먼저 일어나/아침을 맞이합니다.//몇 뙈기 안 되는 자갈밭/잡초는 무심하게 무성하고/어머니 호미 닳고 닳도록/적삼 젖는 줄 모릅니다.//…//자식이라는 삭풍을 끌어안은 어머니/자식의 부름을 기다려주지 못한 어머니/흘러가는 세월 속에 그 미소 그립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 이름 어머니. 그 이름은 아무리 불러도 지루하지가 않다. 그 어머니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형제들이 있다. 그리고 내 자녀들이 있고, 손자손녀가 있다. 때문에 어머니는 생명을 이어주는 아주 고마운 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어머니의 태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가장 편안한 곳이었으며,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또 어머니의 가슴은 생명을 이어주는 생명의 젖줄이었다. 우리는 어머니의 젖을 빨며, 생명을 보존했고, 장성한 오늘이 내가 있게 되었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생각하면, 어릴 적 좋은 일들만 생각난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든지, 아니면 젖을 물고 단잠에 들었다. 또 기차 안이나, 버스 안에서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을 자주 보았다. 심지어 아기들이 어머니의 젖이 아니더라도, 할머니의 젖을 만지거나, 젖을 물고 단잠에 들었다. 당시 이러한 모습에 대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를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게 생각을 했다. 한마디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사랑과 평화를 그대로 느끼게 했다.

헌데 오늘의 어머니들은 가슴을 내놓고, 아기에게 생명의 젖을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을 창피하게 여긴다는데 문제가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모유먹이기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부응이라도 하듯, 기차 안이나. 공공장소에는 수유실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이렇게 아이에게 생명의 젖을 먹이는 것에 대해 창피하게 생각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만지며 단잠에 들었던 어머니의 젖가슴과 10 달동안 안식했던 태가 상품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어머니들은 창피한 것도 모르고, 우리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아무 곳에서나 생명의 젖을 공급해 주었다. 때문에 우리는 어머니의 젖가슴과 태를 생명이라고 부른다. 또 평화이며, 행복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어머니는 생명이며, 사랑이고, 행복이며, 평화이다.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족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가업을 이어주었다.

그런 어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데 서글프다. 보고 싶어도 보지를 못하고,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어도 그럴 어머니가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형제들이 모이는 자리도 크게 줄었다. 가족의 구심점이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 없어진 것이다. 살아계셨으면 잘해 드릴 텐데.

사실 어머니는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 일생동안 자식을 위해서 희생만 하셨다. 자식들이 장성하여 어엿한 직장에 다니며, 성공했다고 싶으면, 자식들의 따뜻한 밥 한그릇 대접을 받지 못하고 병을 얻어 하늘나라에 가신다. 한마디로 일생동안 아버지와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만 하시다가 마지막 병을 얻어 돌아가신다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잘 모시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가족의 구심점이 없는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져 무엇이 그리 바쁜지 만나기도 힘들다. 고작해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정도이다. 그리고 1년에 한두번 명절날 만나서 어머니를 그리워 한다. 병원에 누워계신 어머니가 그립다. 요즘 같아서는 병원비가 들어가더라도 병원에 누워계신 그 어머니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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