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예수께서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자 바리새인, 서기관 등 당시 지도층 사람들은 예수를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며 비난했다. 이때 저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 등이다(눅 15장). 이 모든 비유의 요점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뻐하심에는 회개와 자기희생의 조건이 따른다.

출애굽 때 일이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있었다. 그 사이 산 아래 백성들은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며 광란의 춤을 췄다(출 32:1-6).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기막힌 장면에 한동안 상심하게 된다. 하지만 모세는 마음을 가다듬고 엎드려 빌기를 ‘만일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심판하신다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성하리라고 이들에게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어 주소서’ 라고 했다. 모세의 간절함이 얼마나 극진했던지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심판을 유예하신다. 그 대신 모세는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자’란 단지 덕망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모세처럼 백성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중보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중보기도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중보기도는 립서비스로 하는 게 아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간절함이 있을 때 그런 중보기도는 의미가 있다. 요즘 항간에 이순신의 리더십이 새삼스럽게 회자되고 있다. 그의 전술, 전략, 부하를 다루는 용병술 등은 매혹적인 리더십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순신의 리더십이 그의 품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이순신의 리더십은 ‘중보자적인 리더십’이라고 볼 수 있다. 원균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원균 역시 패기 넘치고 충성스런 장수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는 부하들의 목숨, 백성들의 안위보다 출세를 위한 자신의 전공 세우기에 급급했다. 이순신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전공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적으로 역도의 누명을 쓰면서까지 백성들의 안위, 부하들의 목숨을 아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모세의 뛰어남이 그러하다. 그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고통 받음을 개의치 않았다. 이런 모세의 자기희생은 뒤에 오실 메시아 곧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게 된 것이다. 극단적인 청교도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하나님과만 사귀는 일은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죄악이 범람하는 세상에 개입해서 중보자가 되어 고통을 겪기는 어렵다. 우리 주변에는 기회를 엿보아 출세하려는 지도자는 많다. 교회마다 중보기도는 넘쳐나는데 과연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중보자로 나서는 지도자가 몇이나 될까?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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