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교회는 100억 아니 3000억짜리 교회당이 경쟁적으로 건축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예수를 시멘트 속에 가두어, 가진 자들의 예수로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하게 한다. 사실 한국교회는 부자들의 종교로 변질되면서, 교회당을 이들의 정서에 맞게 건축하고, 치장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같이 변질된 교회를 풍자화 한 희곡 <금관의 예수>가 있다. <금관의 예수>의 작가는 김지하 시인이며, 김민기가 노래했다. <금관의 예수>에는 현실을 도피하는 신부를 비롯한 수녀, 경찰, 문둥병자, 거지, 사장, 창녀 등이 등장한다.

이야기 줄거리는 빈민촌 사창가의 집이 헐리는데, 이 추운겨울에 갈데없는 창녀들을 위해서 철거반대 데모에 앞장서라고 수녀가 신부에게 종용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신부는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철거반대운동을 회피한다. 또 추운겨울 새벽 문둥병자와 거지가 시멘트로 만들어진 예수의 상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가운데로 신부와 호화로운 교회건축을 담당한 사장이 지나간다. 거지와 문둥병자는 신부를 향해 ‘예수를 팔아먹고 사는 예수쟁이’라고 조롱한다.

분명 시멘트로 만들어진 예수상은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오늘 침묵하는 예수, 아니 이 땅의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거지와 문둥병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경찰도 지나간다. 경찰을 본 거지와 문둥병자는 허겁지겁 도망을 간다. 경찰은 행인들에게서 뜯어낸 돈의 일부를 상납하라고 거지와 문둥병자를 협박하다가 사장을 보고, 급하게 따라간다. 마지막에 등장한 창녀는 문둥병자와 거지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을 먹이기 위해 어디론가 데리고 간다.

금관의 예수상이 있는 광장에서 문둥병자는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육중한 예수의 상을 바라보며, 신세타령을 한다. 그러다가 예수의 상 앞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 이 때 문둥병자의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진다. 빗물인가 했더니, 시멘트 예수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닌가. 그 때 문둥병자는 예수의 상 머리에 씌워진 금관을 발견하고, 금관을 벗겨 가지고 좋아한다. 이 때 예수의 입이 열려 말을 하기 시작한다.

예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문둥병자를 향해 “그 금관은 너의 것이니 가져가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는 “너무 오랜 세월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적적한 시멘트 감옥 속에서 너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또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며, “너희들이 불행 속에 네가 불꽃으로 타오를 날을 희망하며 왔다”고 외쳤다.

그렇다. 예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오셨다. 헌데 오늘 한국기독교는 예수를 신전에 가두고,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부자들을 위한 교회, 부자가 된 교회는 갇힌 자들과 박해받는 의로운 사람, 굶주린 사람들을 외면하며, 예수의 귀를 틀어막고 있다. 오늘 한국기독교가 세속에 길들여진 나머지 안락과 부귀와 명예와 권세를 쫓으며 예수를 시멘트 신전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둥병자가 금관을 훔쳤다며, 도둑으로 몰자, 문둥병자는 금관을 예수상의 머리 위에 다시 올려놓고, 두려워 떤다. 그러자 예수의 입은 닫혀버렸으며, 침묵하는 예수가 됐다. 오늘 한국기독교는 권력과 돈에 길들여진 나머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고 있다.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의 ‘피의 절규’를 외면하며, 십자가탑을 높이는데만 혈안이 되어,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위압감을 심어주고 있다.

분명 한국기독교는 매너리즘에 빠져 예수를 신학과 시멘트의 틀 속에 가두어 버렸다, 예수의 이름을 내세워 돈!돈!돈!을 외치며, 헌금을 뜯어내는데에만 급급하고 있다. 예수는 시멘트 속에서 해방돼 이 땅의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 갇힌 자 등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일하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기독교는 잊고 있다.

분명한 것은 타락한 한국기독교는 예수를 시멘트의 신전 속에 가두고, 부자들을 위한 예수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세월호 참사로 눈물을 흘리는 유가족들의 눈물조차 닦아주지를 못했으며, 사회적 약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 구원에 대한 확신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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