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호수에 내려왔다.

소나기가
호수를 지웠다

비가 멎고
호수 위에
다시 산이 우뚝 섰다

내 그리움처럼
내 사랑처럼
지워지지 않는 산

▲ 정 재 영 장로
시는 형상화를 만드는 언어 예술이다. 관념을 실념(實念)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시는 과학적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숨겨진 진실을 보여주려 함이다. 원래 과학은 사실(fact)을 추구하고, 문학은 진실(truth)을 추구한다. 전자는 관찰(observation)로, 후자는 직관(insight)에 의해 이루어진다. 문학 특히 시는 모순을 통한 진실의 추구다.

첫 연은 논리적으로 볼 때 모순이다. 산은 언제나 고정된 모습으로 있을 뿐이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산이 내려왔다’는 말은 산 그림자가 호수에 비쳤다는 뜻으로, 역발상 즉 역설이나 아이러니 작업이다.

2연에서도 마찬가지다. 호수에 소나기가 내리는 모습을 의인화한 것이다. 소나기가 내려 호수 면에 산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된 것을 ‘지웠다’고 말하고 있다.

3연은 소나기가 멈추자 다시 호수에 비친 산이 제 모습을 찾은 상태다. 역시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산이란 물속에 우뚝 설 수 없지만 호수에 비치는 선명성을 말하는 것이다.

현대시에서 추구하는 수사법인 기상(기발한 착상 conceit)은 마지막 연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산과 자아와의 일치다. 소나기에 의해 잠시 지워졌던 산과 같은 가치들이 더 선명하게 재생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망각이나 흔들려던 가치가 다시 원초적인 모습으로 회복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소나기는 잠시의 현상, 곧 일회성의 외부적인 영향으로 온 혼란이나 어려움이라는 관념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움의 대상이나 사랑의 대상처럼 화자의 최고 가치는 산처럼 어떤 경우나, 언제나, 변치 않고 늘 그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는 미학적 담론이다.

그럼 그리움과 사랑의 대상은 누구일까? 친구나 연인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대상이라고 간주해도 역시 자연스럽다. 예시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크게 두 부분이다. 하나는 산이요, 다른 하나는 물이다. 산과 물은 서로 상반성의 이미지다. 산은 고정의 사물이요, 물은 유동성이다. 전자는 불변의 이치요, 후자는 가변적인 속성이다.

엘리엇이 말했듯이 양극화(상반)된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는 태도가 융합성이며, 이런 작품을 융합시라 한다. 그런 작품은 단순함 속에도 많은 의미를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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