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용 길 목사
여성의 위치에 대한 말들이 많다. 예를 들면 베갯머리 송사, 세계를 남자가 다스리고 그 남자를 여자가 다스린다고 하는 말이 그렇고, 요즈음은 사자성어도 바뀌었다. 여존남비…, 뿐만 아니라 출산성향도 달라졌다. 여아출생률이 높아졌고, 여자 값이 높아 외국에서 신부감 수입을 하고 남자는 절대로 수입하지 않는다. 여성의 상위론은 요즈음 시험성적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사법시험 등등 최고 국가고시에서 이미 여성합격선이 50%를 벌써 넘어섰다. 지금 초등학교 교사는 여성이 완전히 점령했다.

여성의 귀하기는 옷값과 치장의 값이 또 결정한다. 옷값, 보석류, 구두, 액세서리는 완전히 고가다. 진품이 아니면 유사품이라도 가져야 하는 양상이고 보면, 여성이 그 얼마나 귀하고 그 위치가 상위인지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여성의 배설물이 다르다. 다른 것은 남자와 다 같은데 매달 멘스를 하는 것이 다르다. 문제는 하고 안하고가 아니고 피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피보다 진하고 피의 귀한 것을 무엇에 비교하겠는가, 값은 차제에 두더라도 그 본질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피는 생명잉태의 본질이고 생명을 여인이 낳는다는 사실로 확실히 여존남비, 여성상위는 기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설물조차 다르니….

생각해보라. 남자들의 아니 인간의 영원한 품, 향수(鄕愁) 그것은 바로 어머니 아닌가? 어머니가 남자인가? 여기서 그만 우린 여성상위에 대한 결론에 손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성경이 가르친다. 맨 처음 여인을 지으실 때 남자 지으시고 난 후, 완벽한 여성을 만드시는데 재료는 남성의 갈비뼈가 첨가되었다. 그래서 최고의 양질의 재료로 창조되어 탄생하게 된 존재가 여성이다.

우리는 먼저 선악과를 먹은 일로 여성을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 사탄이 약점을 공격했을까? 아니다. 여자 넘어뜨리면 도미노이론처럼 남자는 자연히 넘어지리라는 계산을 하고 사탄은 여성을 선 공격했을 것은 자명하다. 남자야 줏대 없이 따라올 것이 분명하니 여성을 공격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인 것이다. 그것도 감성과 무드를 최대한으로 이용해 그 심리를 따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어 놓았는데, 성경은 그것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게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들고 말았으니, 여성의 유약함도 아니고 여성을 선 공격 대상을 삼은 사탄의 지혜로움보다 여성을 먼저 공격해야 할 만큼 그 대상 그 여성의 강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한 자가 돕는 자 될 자격을 갖추었던가? 여성이 남자의 돕는 배필이 된다는 사실은 그 우위성을 하나님이 스스로 인정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여성의 강함과 지혜로움의 탁월성을 나쁜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게 하시려고 중징계(?) 출산의 고통과 낳은 자식을 사랑하는 결정적인 족쇄를 채워주심으로 그 힘을 그 지혜로움을 제어하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 그뿐인가? 에베소교회의 바울이 쓴 편지를 보면 여자는 남편의 말에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목숨 바쳐 사랑할 것을 권고한다는 사실이다. 쉽게는 여성이 남자를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이런 생각은 미완성의 지식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고 지금 세상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여성과 결혼을 포기해야 할 만큼의 세상이 되었다.

지금 당장 딸을 낳으면 춤추는 세상인데 말해 무슨 유익을 얻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인 나 자신이 한심하고 우울하기보다는 여성 상위론을 지지하고 그 증거를 댈 나의 사상의 건전성에 대하여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교회 목회를 통해 얻은 결론이다. 아내가 내 목회의 코치와 코디를 겸하고 또 여성신도들 숫자가 절대적이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폭발적 부흥의 원동력이 여성에게 있다는 사실로도 우위성은 충분히 입증되는데, 더 첨부한다면 대형교회의 문제가 여성을 목사로 장로로 세우지 않는 합동측 교단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생각이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안수문제를 일찍이 해결한 교단들은 교회의 갈등에서 자유롭다. 오히려 목사의 위치가 더 견고해져 간다. 나의 판단일까? 견문이 적은 소견이라고 치부할 것인가? 아니다. 그만큼 여성 중재의 역할은 화해조정능력의 탁월성을 인정해도 유익하다.

그런데 막말로 ‘걸레 찬 여자는 강단에 설수 없다? 여자는 신대원에 입학할 수 없다’ 하니 이 교단은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한국교회 대 교단이라고 자부하면서, 하는 꼬락서니는 마치 19세기에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으니… 그 교단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의 행태하고 해도 많은 수의 현명한 구성원이 있다한들 자정능력을 상실한 부류들로 치부된다면 무슨 소망이 있으랴? 한국교회의 미래에 누가 될까 싶다.

한마음교회 담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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