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진 것이
바라는 것보다
어쩌면
늘
부족한 듯한데
내일을 갈망하는
삶의 터전에
정제된 귀한 것으로만
채우려 하는 것이기에
삶이란
대지의 사계四季처럼
엄숙하고도
찬란한 것
예시도 2행과 3행 사이에 생략한 반전의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기승의 단계를 건너 뛰어 3연으로 결론을 지어낸다.
화자는 삶의 속성을 항상 부족한 것으로 인지한다. 그 이유는 가진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정제된 귀한 것’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라는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그 때마다 가지는 엄숙하고 찬란한 모습이라 한다. 이 말은 삶이란 어느 경우에도 종교적 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 함이다.
계절이 바뀌면 항상 그 계절에 맞는 것이 필요하다. 여름의 부채는 가을만 되어도 필요하지 않는 물건으로, 옛 분들이 그런 것을 비유하여 추선(秋扇)이라 하지 않았던가. 봄은 꽃의 계절이고, 여름은 성숙시키는 절기고, 가을은 결실을 보이며, 겨울은 지나온 자기의 세월로 스스로 안식을 만끽하는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 즉 삶이란 절기에 따라 각각 고귀함의 가치가 달라지는 변화의 속성을 가진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삶은 항상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족함이 곧 삶의 특성이며, 가치라는 것이다.
‘대지의 사계’라 함도 자연의 이치에서 삶의 고귀함을 발견하는 잠재된 의식을 추론하게 한다. 이 대지란 우주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으로, 대지를 통해 삶의 과정과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곧 우주의 본연의 진리를 깨닫는 시적 변용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3행에서 보는 논리의 추월은 삶이라는 철학적 정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부족함이 무엇인지 또는 ‘정제된 귀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종교적 의미인 대지가 말해주는 가치관으로 그 부분을 상상해서 채워 삶의 의미를 그려볼 수 있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