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진보 보수진영이 화합하는 사실상 최초의 사건이라고 언론이 대대적으로 떠들었던 ‘WCC 총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공동선언문’이 결국 총회를 불과 10개월 앞둔 시점에서 한국교회에 먹구름을 몰고 오고 있다. 지난 13일 서울 명성교회에서 열린 WCC 제10차 총회 전진대회에 앞서 WCC총회 한국준비위 김삼환 상임위원장, 김영주 교회협 총무, 한기총 홍재철 대표회장, WEA총회준비위 길자연 위원장 등 4인은 기자회견을 열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공동선언문을 한기총은 지난 14일 실행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면서 “한기총이 WCC를 이겼다”고 만세를 부른 반면 교회협을 비롯한 에큐메니칼 진영은 마치 폭탄을 맞은 듯한 모습이다.

특히 교회협은 지난 17일 실행위에서 대부분의 실행위원들이 총무 혼자서 서명한 이 문서를 '쓰레기'로 규정하며 당장 파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날 에큐메니컬 진영 30개 단체들도 성명을 내고 공동선언 파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특히 공동선언의 4가지 조항이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진영이 간직해 온 신학적 양심과 신앙고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동선언문 중 ▲개종전도 금지주의 반대 조항은 합의과정에서 한기총이 강력히 요구해 삽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제는 한기총이 개종 전도 대상으로 삼은 정교회가 교회협 회원 교단이고 WCC 회원 가운데 1/3이 정교회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공동선언문은 교회협이 여태껏 취해 온 자세와 정체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009년 8월 31일 WCC 총회 한국 유치가 확정된 이래, 보수 교계의 반발은 극심했다. 특히 한기총과 예장 합동측은 한국교회 보수권의 좌장역할을 하며 그 중심에 있었다. 이번 공동선언문에 참여한 길자연·홍재철 목사는 모두 한기총 전·현직 대표회장이자 예장 합동 소속으로, WCC 반대운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더구나 한기총은 10월 19일 열린 임원회에서 예장 통합을 이단연루 및 친종교다원주의 교단으로 규정했고, WCC를 이단이자 사단, 적그리스도단체라고 지칭했다. 그러던 한기총이 불과 3개월만에 WCC 총회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입장을 180도 바꾸게 되리란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WCC 총회 준비위원회는 그동안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온 보수권 교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심을 거듭해 왔다. 특히 상임위원장 김삼환 목사는 WCC총회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만큼 한국교회 전체를 하나로 묶기 위해 골똘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가 한기총 등 보수권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한 점은 십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합의 절차와 과정에 있었다. 또한 스스로의 정체성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린 명분 논리에 있다.

교회협 총무 혼자서 에큐메니칼 진영을 대표할 수도 없을뿐더러 보수 진보가 하나가 된다는 명분 하나만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허무는 합의에 끌려들어갔다는 점은 두고두고 문제가 될만하다. 또한 이 합의가 충분한 신학적 논의와 대화 없이 전진대회를 앞두고 급조됐다는 점에서 그동안 목숨처럼 지켜온 한국교회의 ‘신학’이라는 명분 논리 이면에 정치노름이 자리하고 있었을 만 천하에 드러내는 꼴이 됐다.

결국 열매는 없고 깊은 상처만 남았다. 교회협이 이 선언문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든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가리기엔 이미 때가 늦었다. “어떤 특정한 교리나 법규를 고집하지 않으며, 모든 회원 교회들이 간직하고 있는 참된 교회의 경험들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교회 연합 운동의 정신을 구현한다”는 교회협의 선언이 무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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