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승리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식민지신학과 지배이데올로기에 빠져들면서, 교회 역시 ‘맘몬’의 우상을 섬기는 결과를 만들었다. 반면 성서의 십자가정신과 섬김의 신앙은 점점 실종되고 있다. 따라서 승리자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를 않고, 탐욕의 소리만 들려오고 있다. 강단은 이미 ‘헌금의 액수가 바로 하늘나라’라는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목소리로 가득 찼으며, 경건해야 할 교회당은 굿판으로 변질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한국교회가 이단사이비화 되지 않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 사진설명-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한국개신교는 승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 이단인가(?)

새해 벽두부터 한국교회는 이단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여기에다 일부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단체들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다. 이단연구가를 자처하는 이모권사가 S단체의 공격을 받아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최모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B교회도 S단체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S단체의 공격은 여기에서 끝나지를 않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총회사무실 공격으로 번졌다. 이들은 연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합신측과 이단연구가인 박모목사, 최모목사, 이모권사를 공격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을 비난하는 유인물도 대량 배포했다. 

한국교회 내에서 이단논쟁이 벌어진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소모적인 이단논쟁으로 한국교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4년전 개혁측 일부가 다락방을 영입해 새로운 교단으로 출발한 개혁전도측이 결국 분열의 수순을 밟은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개혁전도측은 개신대학원대학교와 경기제1노회가 별도의 개신총회를 구성, 사실상 분열됐다. 한마디로 다락방을 영입한 개혁측은 ‘교단’의 이름을 다락방에 넘겨주는 꼴이 됐다. 개혁전도측과의 결별을 선언한 경기제1노회 및 개신대 교수들은 개신총회를 창립하고,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한 교단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에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분열의 단초를 제공한 다락방측에 대한 재조사를 둘러싸고 갈등까지 겹쳐 첩첩산중이다. 

그렇다면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기에 급급한 한국 기성교회는 이단사이비로부터 자유로운가(?)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신천지를 비롯한 안산홍증인회, 통일교 등의 단체에 대해, 이단성이 있다는 사실을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 모두는 주지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점점 이단사이비화 되어가는 기성교회의 현실이다.

강단을 굿당으로 만들어 버린 일부 한국교회의 영성운동가와 부흥사와 목회자,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며, 부자들의 종교로 변질시킨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 이미 타락한 중세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돈!돈!돈! 돈을 외치며, ‘믿음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목회자, 하나님나라의 척도를 헌금액수로 계산하는 목회자, 권력의 주변을 맴도는 정치적인 목회자, 선거철만 되면 선거운동에 개입하는 목회자,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목회자 등등… 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정죄할 것인가(?)

이 같은 한국교회의 변질은 영미의 선교사들이 하나님 대신 맘몬신앙을 심어준 결과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이의가 없다. 오늘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데 길들여졌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돈을 버리지 않고서는 나를 따를 수 없다고 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성경말씀에 역행하면서 사는 목회자와 교인,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는 목회자와 교인은 분명 성경에 벗어난 삶을 사는 이단 및 사이비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가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는 세상’ 기원

이단과의 전쟁을 선포한 대부분의 교회, 하나님 대신 맘몬과 바벨을 노래
식민지신학과 지배자의 신학에 매몰돼 성서의 십자가와 섬김의 신앙 실종

 세계화는 하나님 아닌 맘몬의 승리

500년전 콜럼버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선언한 “하나님이 승리할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는 것을 굳게 믿고, 스페인을 출발하여 신대륙을 향해갔다. 그리고 인디오들을 살육하며, 그곳에 맘몬과 바벨의 문화인 유럽의 문화를 이식시켰다. 콜럼버스의 세계화의 꿈은 500년이 지난 오늘 자본주의라는 보편화된 문명의 승리였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맘몬이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다시 말해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재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하나님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성체는 돈이 됐다. 결국 오늘 한국교회는 식민지신학과 지배자의 신학에 길들여진 나머지, 맘몬과 바벨의 우상을 섬기며, 교회는 탐욕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세계화를 통하여 새롭게 등장한 교회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 정치적 불안을 위협적으로 배가시키고, 민족 사이, 아니 한 국가 내에서 승리자와 패배자의 골을 깊어지게 만들었다. 오늘 그 격차는 갈수록 크게 벌어지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목회자들 간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가난한 교회와 부자교회간의 협력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세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가 그렇게 찬양하던 세계화, 글로벌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중의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이라는 맘몬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인간은 자본이라는 맘몬에 무제약적으로 얽매여 자유를 상실했다. 대신 자본의 노예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고 선언했다. 여기에서 자유에 대한 개신교의 잘못된 이해는 구자유주의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사회를 거쳐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맘몬으로 양도하고, 그것의 종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세 번에 걸친 세계화는, 유럽의 문화와 종교, 생활습관을 가난한 나라에 그대로 이식시키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또한 신학과 신앙도 영미의 신학과 신앙을 그대로 판박이 했다. 그 결과 개신교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탐욕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맘몬과 바벨을 숭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단연구가로서의 자격이 없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세계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점령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와 문화까지도 서구사람들에게 점령당했다. 오늘날 우리들의 의식주는 물론, 사고방식, 가치관마저도, 우리의 고유문화라기보다 서구적 양식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당을 비롯한 교회 실내장식 등 모두가 우리의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유럽인들의 눈에 남미의 인디오 문화는, 문화가 아닌 민속으로, 그들의 종교는 미신으로, 언어는 방언으로, 그들의 예술작품은 수공업으로 이해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우리의 음악을 그냥 음악이 아니라, ‘국악’, ‘민속음악’이라고 부르고, 우리의 춤은 ‘민속춤’이라고 부르는 잘못을 범했다. 이것은 분명 서구의 것이 보편적이며, 우월하고, 우리의 것은 그에 비해 열등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크게 반영된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언어도 만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려는 것도, 지배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은 한국개신교는, 우리 것을 멀리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잘못을 범했다. 자기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이단연구가라고 자처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70-80년대 한국개신교에서 한참 연구되었던 민중신학도, 보수적인 신학자와 이단연구가들에 의해 ‘이단신학’으로 매도됐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의 이단연구가와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영미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식민지신학과 지배자의 신학에서 벗어나면, 아니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지 않으면’, 무조건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콜럼버스에 의해서 시작된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맘몬이 되었다. 그 어디에서도 우리를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어 내지를 못했다. 
          
‘영성’이란 이름아래 강단을 ‘굿판’으로 변질시킨 한국교회

서양의 식민지신학과 지배이데올로기신학에 빠진 오늘 한국개신교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마술봉’으로 만들어버려 자신들에게 필요한때 ‘복덕방망이’로 이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기적을 행하는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 마술쟁이로 삼는다. 즉 치유목회에 역점을 두고 있는 목회자들은 치유능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챙기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성공한 목회자로 군림하며, 치유기도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 목회자는 이적과 기적을 행사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능력인 양, 업적을 자랑하여 종교를 ‘이권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딤모데전서 6:6)’이 판을 치는 한국개신교회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사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과 섬김의 정신은 상실되고, 이단인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세상이 도래됐다.

따라서 교회마다 큰돈을 모아서 맘몬교회당을 건축하고, 호화로운 십자가탑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만들었다. 목회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자신의 업적으로 삼고, 하나님의 은총은 모두 사장시켜 버렸다. 한마디로 식민지신학과 지배자의 신학은 결국 한국개신교를 업적주의와 성공지향주의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천박하고, 쓰레기와 같은 ‘복음’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진정한 복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담긴 말씀대로 사는 구원의 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자기자랑과 성공주의에 빠져 더 이상 하나님을 시험하지를 말아야 한다. 또 교회는 온 세상과 그 영광을 차지하려는 로마적 유혹, 권력에 대한 침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그리스도가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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