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1. 성육신하신 중보자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하여 영광을 돌리는 중보자가 되어야만 하겠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동시에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완벽한 삶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이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4)

지식적으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지혜를 추구하고 있다. 종교적인 분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하늘에 올라가서 무엇을 하는 것처럼 속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는 모든 지혜의 추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스스로는 지혜의 본질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려면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하는 중보자가 있어야 한다.

출애굽기 19장에서, 모세는 시내산 위에 강림하신 하나님과 산 아래에 머물던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의 역할을 했다. 제사장들은 지성소 깊은 곳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성막 밖에 머물고 있던 백성들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였다. 제사장들은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속죄물로서 동물의 피를 흘리는 희생제사를 드렸다. 사람들의 죄를 처리하는 대행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지성적인 실패, 종교적인 반역을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구약성경의 행동들과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들이었다. 마지막 중보자로 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중간 역할을 해 줄 그 어떤 다른 사람을 정하게 될 것이고 그와 관계를 맺을 것이다. 그 종교인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은 자들에게 중보자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토록 많은 종교인들과 종교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가짜 중보자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모방하여 그럴듯하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들은 모두 다 거짓된 함정들이다. 결코 사랑과 위로와 평안을 주지 못한다.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신 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나님에 관한 모든 중요한 특징들을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과 존재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진리를 풀어서 설명해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와서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살고,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인인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냈다. 예수님은 위에서, 하늘에서, 초월적으로 내려오신 분이시다 (약 1:17, 3:15). 앞 장에서 모세가 체험한 “야라드 원리” 즉 낮아지심과 동일하면서도 더욱 더 분명하다. 에베소서 4장 9절에,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문하였다.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던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성육신이란 무엇을 가르쳐 주시는 것인가? 중보자가 되시고자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으로 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자신이 하늘에서 왔다고 말씀하였다. 요한복음 6장 32-38에 보면, 예수님의 강조가 확연히 드러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성육신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은 참으로 오묘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요 1:14)고 선포되었다.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들과 함께 ‘머물러’ 계신다. 이미 모세 시대에 광야 길에서 헤매던 백성들 사이에 성막의 형태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여주셨는데, 이와 동일한 방식이다. 방향감각도 모른 채, 출애굽에 나선 이스라엘 족속들은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임재하신 것은 임시적인 것이었지만, 회막과 성전의 완성으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는 것은 그 이전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에게 주시는 엄청난 축복이다. 사람과의 교통하시고 교제하시고 대화하신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마침내 성령을 부어주신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가운데서 사람에게 낮아지신 하나님의 임재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한 사건적인 단계에 해당한다. 항상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에게로 가져오신 것이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서 가까이 대면하고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거할 처소가 되도록 만드시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바꿔놓는다.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육체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출현이요, 장차 다가올 모든 사역들을 보여주는 단초가 되는 일이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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