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그늘에 깔려
볼 수도 없는 뙈기밭
근근이 연명하였네
춘향春香에 눌려 하늘 볼 수 없었다
하림夏林에 가려 숨도 못 쉬었다
갈바람 내 벗이 길 터주는구나
돌 틈새에서 어렵게 살아도
관심조차 없던 아픔 가슴이
이렇게 장하고 기특할 줄이야
비길 수 없는 화사함
가슴 터지도록 풍기는 국향菊香
시린 한을 높이 곧 토하고 있구나
때가 돼야 인고忍苦가 피는 것을
한限이 차야 한限을 뿜은 것을
너의 심지心志가 지금에야 알 것 같구나
그리스의 철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했다. 크로노스는 달력에 기록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평한 24시간처럼 절대적인 시간이다. 연속적이어서 빌려오거나 저장이 안 되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꽉 찬 특수한 시간으로, 구체적인 사건의 순간을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시간인 것이다. 일종의 기회이며, 어떤 의미의 순간을 말한다. 원래 카이로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이 신은 앞에 머리가 있으나 뒤는 대머리가 된 모양을 가진다. 즉 기회란 지나가면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은유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때는 다음과 같이 카이로스적 이다.
화자에게 주어진 환경적 조건은 뙈기밭이다. 이것은 넉넉하지 못함을 상징한다. 이런 한정적인 조건이 근근이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안에서도 삶의 내용은 봄의 향기로 가득하고, 여름의 숲처럼 착실한 내실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갈바람이란 가을 선선한 바람을 지칭한다. 즉 가을에 곡식을 익게 하는 도움을 주는 바람이다. 종교적인 도움을 암시한다.
‘비길 수 없는 화사함’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다. 보람과 감사, 그리고 자족감의 정서를 읽게 해준다.
가을꽃으로 상징되는 국화의 향기는 주어진 조건을 극복함으로 오히려 그 불리한 조건을 승화시킨 삶의 모습을 밝힌다. 따라서 마지막 행 ‘너의 심지(心志)’란 다름 아닌 시적 주체가 품은 뜻이다.
이처럼 계절의 특징을 통해, 주어진 한정적인 조건을 극복한 삶이 보여주는 때의 카이로스적 의미를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