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도 사라지고
휴전선도 사라지고
그러고도 한참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일까?
여름 밤을 뜬눈으로 지새고도
끝내 풀 수 없는
그러한 문제는 무엇일까?
돌아오지 않는 다리
다시 이어진 대동강 다리
모두 손잡고 건널 때에도
우리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늘도
나의 시는 이 물음의 해답을 찾아
광복동 거리나
태평로 한복판에서 서성거린다.
물어도 물어도
모습 드러내지 않는
그 문제는 도대체 무엇일까?

▲ 정 재 영 장로
예시 안에는 네 번의 물음표가 나온다. 첫 번째 물음은 남북의 문제와 같은 해결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이 해결되었다는 가정 안에서도 해결될 수 없을 거라는 말이다. 즉 인간이 마지막까지 구하지 못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말한다. 두 번째도 그것은 시간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재강조하는 질문이다. 세 번째는 인간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원형과 같은 본질적인 의문이다. 마지막 네 번째 질문은 다른 인간에게 물어본다고 그것을 찾아낼 수 없을 거라는 불가능할 수 있다는 역설적 의문이다. 이처럼 제목인 시는 시인에게는 자신이 스스로 추구하여 하는 종교와 같은 것이다. 내용은 구체적이지 않지만, ‘광복동 거리나/ 태평로 한복판에서 서성거린다.’ 하듯 답을 구하려는 모습은 처절할 정도로 구도자의 간절함이 들어있다. 

 그럼 시인이 가진 의문은 무얼까? ‘이 물음의 해답’을 구하는 일은 의문의 의문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읽는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더욱 궁금해진다. 의문에 대한 확실한 정리가 된다는 것은 이미 해답을 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치 의학에서 병의 원인이 분명하게 규명되면 쉬운 치료법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일반적으로 원인에 대한 규명이 확실치 못해 해답도 모르듯, 시인은 시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품는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구도자와 같다.

 물론 시의 정의가 시인 수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답도 하나로 정의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시에 대한 의문은 영원히 정복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시인이 가진 자기의 시에 대한 태도는 남북문제처럼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밤을 새우면서 수많은 생각을 한다 해도, 인간 삶의 한 복판의 거리를 걸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본다 해도, 그 답이 해결될 수 없을 거라는 뜻이다. 시의 제목의 ‘다시’처럼 알 듯 하다고도 다시 모르게 되는, 반복의 의문이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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