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16명이 포함된 33인의 독립선언문은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만세운동의 현장에 없었다. 그리고 16인 기독교 대표는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하는 안타까운 역사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바로 2.8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학생들과 다른 점이다. 독립선언문은 하와이에서도, 미국본토에서도 낭독됐다.

1919년 3월 1일 자칭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은 학생들과 아녀자, 부랑인, 농촌에서 상경한 농업농민들에 의해서 전국방방곡곡에 뿌려졌으며, 33인은 독립선언문을 태화관에서 낭독하고, 일본경찰이 오기를 기다렸다. 또 이 독립선언문이 전 국민에 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지방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깨어난 사가들이 33인을 민족대표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3인은 스스로 민족대표라 불렀다. 하지만 전국의 교회의 조직이 움직여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주체는 기독농민과 기독여성, 거리를 떠도는 유랑민, 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가담해 희생을 당했다. 당시 일본경찰과 헌병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순교를 당한 사람들도 대부분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다. 최근 깨어난 사가들이 3.1운동의 주체를 다시 끄집어 내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기 시작한 일은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의 주체는 기층민중

3.1만세운동이 일어난 당시만 해도, 일본제국주의자가 기독교를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의 종교’로 인식됐다. 한국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양대인’의 세력을 업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외세 의존적 토착민들이 많았다. 이는 선교사와 교회를 배경 삼아 지역주민들에게 폐해를 끼치는 ‘교폐’ 사건으로 이어졌다. 양대인의 자세는 토착화된 교회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즉 조선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심성을 담은 그리스도 선교활동을 펼치지를 못했다. 한국의 기독교 문화와 신학은 서구교회에 종속적이었으며,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식민신학과 지배자신학에 매여 ‘기복신앙’과 ‘축복’만을 강조하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를 정당화해 주는 잘못을 범했다. 한마디로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한민족의 현실정치를 외면했다.

이런 영향을 받은 한국개신교의 지도자들은 강단에서 천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는 오늘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을 뿐만아니라,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에 참여하면서, 한국교회의 교파주의와 제국주의적 선교를 그대로 이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 한국교회가 교파주의와 분열의 중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지 못하고, 교회중심의 선교에 매몰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한국개신교가 식민지사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면서, 일각에서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역사 대부분은 선교사와 교회설립 등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만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분열사로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제 시각을 바꾸어서 식민지 지배세력에 의해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종교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민족·민중사관에서 한국교회사를 새롭게 평가하고, 재조명하는 작업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한국개신교는 조선 민중의 개화를 위해 적지 않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을 비롯한 1918년 동경유학생을 중심한 2.8독립선언, 1919년 3.1만세운동의 중심에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교회로 흘러들어온 지식인과 역사의 주체인 가난한 민중들이 있었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은 기독교의 잔인한 박해로 이어졌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쉽게 무너지고, 신앙의 자유를 유린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한국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황민화정책에 쉽게 동화되어 신사참배를 결의, 민족정신 말살과 하나님을 향한 배교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에 반해 교회와 사회에서 소외받던 여성들과 유랑민, 학생, 농민들은 기독교지도자 및 지식인들이 변질하고 있는 사이에서, 나라와 민족의 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대한독립과 지배세력에 대한 멸망의 증인이 되었다. 당시 전문학교의 학생들은 지도층을 믿을 수 없어 별도의 3,1만세운동을 준비했다는 기록에서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3인은 학생들과 파고다공원서 함께 거사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본경찰에 자수하는 선택을 했다. 한마디로 3.1만세운동의 현장에 33인은 없었다. 이 독립선언문은 서울에 상경한 학생들에 의해 전국의 조선민중들에게 뿌려졌다. 또한 학생들은 3월1일 거사와는 별도로 3월5일 서울역에서의 2차 거사를 계획했다. 이 거사에 참여하기 위해 학생들이 평양을 비롯한 전국 각 지역에서 열차편으로 상경해 서울역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1일 파고다공원 만세운동과 3월5일 서울역 만세운동은,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중심에 전국에 세워진 교회의 여성교인과 기독농업농민, 그리고 유랑자,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여자들이 있었다.

 

“자주독립 외친 순교자 7천300명의 희생을 잊지 말자”

“일본 아베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아시아 국가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발언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거리는 일본차들이 질주하고, 일본의 관광명소는 한국인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일본 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한 한국개신교는, 일본을 향해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여기에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선교사들 역시 한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선교보고서가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일제치하에서 짓밟힌 나라와 민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3.1운동이다. 이 운동의 중심에서 죽음을 맞이한 7천3백여 명의 아녀자와 기독농민, 부랑인, 학생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해방 70년, 3.1운동 96주년을 맞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3.1운동의 주체는 기층민중

3월1일 만세운동은 서울 이외에도 평남,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광주, 익산, 부여, 청포 등에서도 일어났고, 3일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14개소와 함경도 함흥에서도 일어났다. 특히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3월5일 서울역 만세운동은 그 조직을 바탕으로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면, 리 단위까지 운동에 가담했다. 이렇게 3.1운동이 전국으로 번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주동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당시 가장 큰 힘을 가진 교회를 이용했다. 3.1만세운동을 한국교회가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화학당의 유관순이었다. 그녀는 만세운동을 고향인 천안 병천으로 옮겨 놓았다. 부모는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죽었고, 자신도 부상을 당했으며, 7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3.1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불렀다가 형사의 고문으로 17세의 나이에 옥사했다.

민족해방을 위한 조선민중의 봉기는 일본헌병과 경찰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과 학살로 이어졌다. 일본헌병과 경찰의 조직은 강화되었고,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총과 칼을 사용한 무력탄압이 자행됐다. 안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일본헌병의 총격으로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고, 8명이 즉사했다. 강서군 사천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역시 70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중 43명이 즉사했다. 20여명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맹산에서는 일본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54명 즉사, 13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것도 시위하는 민중들을 보통학교로 몰아넣고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다. 연안에서는 사망 80명, 부상 32명, 선천에서는 즉사 25명, 부상자 23명, 함흥에서는 일본경찰이 곡괭이와 몽둥이로 조선민족을 내리쳐 수십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끌려갔다.

강서군 산천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그 중심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헌병대가 발사한 총에 맞아 1명이 즉사하고, 8명이 연행됐다. 화성군 제암리는 마을 주민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면서, 7천3백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렇게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 바로 교회였다. 사상자도 기독교인들과 가난한 민중들이었다.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과 지주들은 대부분 뒷짐을 지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일본경찰과 헌병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기독교인 16명도 일제말 일본의 황민화와 우민화 정책에 쉽게 동화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해 주었다. 또한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해 신사참배에 적극 참여하는 배교행위의 범죄를 저질렀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해방이후 반민족적, 적그리스도적인 행동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기는커녕,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교파주의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한국교회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기보다는, 33인이 3.1운동의 주체인 것처럼 비화하고, 3.1만세운동이 마치 한국교회가 주도한 독립운동으로 포장했다는데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오늘 한국교회가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잊지 말자 일본의 만행을

일본의 만행에 대해서 잊어서도 안되고, 용서할 수도 없다. 이같은 일본의 만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 아베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계속되는 망언,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 과거 전쟁에 대한 정당성 주장, 이웃나라에 준 피해 부정 등의 파렴치한 모습은 인간의 탈을 쓴 금수의 짓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 반성하기보다는, 또 다른 침략을 위해 군국주의 부활의 신호를 알리는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다 조선의 처녀 20만명을 정신대로 끌고간 사실을 대해 부정하는 모습은,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이렇게 일본의 우경화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는데도,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일본의 계속되는 만행에 대해 심각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지도층 인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거리마다 일본차가 질주하고, 주차장에는 일본차가 늘어서 있다. 가정마다 일본제품이 자리하고, 일본의 관광명소는 한국인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심지어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을 정당화 해 주는 인사들까지 나타나 한민족의 자존심을 구기고 있다.

또한 일본천황을 위한 생일잔치가 서울 한복판에서 열렸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정계인사들과 경제계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에 대해 국민 모두로부터  공분을 사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국민 대부분이 인식을 못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의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일본 국가주의에 굴복하고, 대한민국 젊은이들을 향하여 황국군대, 정신대로 나갈 것을 연설하고 다닌 상황에서 일본을 향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때문에 역사의식을 망각한 지도자들의 입에서 일본식민지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 뿐이겠는가(?) 한국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이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발언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제96주년 3.1절을 맞은 한국교회가 무엇이라고 변명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지적했듯이 96년 전 전국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의 현장에 이 나라의 지도자는 없었다. 대신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아리랑고개를 넘은 어머니들과 정의에 불타는 학생, 먹을 것을 찾아 상경한 부랑인, 교회의 구성원인 농업농민, 구원의 표징이며, 지배자들의 종말을 예언한 기독여성들이 일제에 의해 짓밟힌  나라와 민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이 바로 3.1만세운동있었다.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 96주년을 맞아 이 운동의 중심에서 죽음을 맞이한 7천 3백여명의 순교자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 굴욕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나라 미래의 주역인 젊은이들에게 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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