쫒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바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정 재 영 장로
사물의 이중성 모습을 보여준다.
‘쫒아오던 햇빛’은 이동성이고, ‘십자가’는 고정성이다. ‘첨탑’은 높고. 화자는 그 아래 낮은 곳에 있다.
‘들려오지 않는’ ‘종소리’와 ‘휘파람 소리’의 대비도 역시 마찬가지다.

‘괴로웠던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 ‘꽃처럼 피어나는 피’와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는 표현은 생성과 소멸의 그림이다.

모두 이미지들 끼리 대비(contrast)를 통해서 더욱 선명성을 유도하고 있다.

화자가 도전하는 동경의 위치는 다른 시와 동일하다. 하늘의 별과 동일한 상하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늘의 별 대신 십자가의 예수를 대신 제시함으로 그 동경이 ‘예수’라는 인격체의 구체성을 가진다. 별은 차가운 비생물체의 사물이지만, 예수는 피를 가진 따뜻한 인간 모습으로 제시된다. 예수를 피를 가진 인격체로 이미지화하는 것에서 그의 구원의식은 초월적인 해탈이나 초인이 아닌, 인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구원의식을 가진다.

하늘(신)과 인간(화자)이 만나는 접점을 십자가로 보여줌으로, 예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신(별)이고, 하늘의 입장에서는 인간인 것이다.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이라는 신학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신과 인간의 만나는 지점이 십자가 첨탑이다.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점이며, 신이 인간을 만나는 최저점이다.

이런 신과 인간의 양극화의 속성에서 엘리엇의 이론을 빌린다면 폭력적으로 결합하는 상징이 곧 십자가의 첨단이다.

또한 ‘허락된다면’이란 말은 앞에서 말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추구가 아니다.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조용히 흘리는’ 자기희생에서 ‘주어진 길을 걸어야겠다’는 표현은「서시」와 동일한 의식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피동적이라 말하는 것보다는 초월적인 자아의식이라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의식에 대한 순응을 조용히 추구하는 실천적인 면에서 더욱 예술적이다. 이 시는 종교적인 목적시나 시대적 상황에 바탕을 둔 저항시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보편적 가치에 순응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진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