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불의가 일반 현상이 된 곳에서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래야 살 수가 없다. 누군가가 거기서 이탈하려 하면 세상은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심문 받으실 때도 그랬다. 모두가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사람들은 전염병과 같은 죄악에 오염되어서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이런 험악한 공기 속에서 옳고 그름의 분별은 부질없는 일이다. 무지한 일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 따위는 받지 않는다. 모두가 축제라도 벌이듯 신바람 나서 예수를 죽이라고 고함친다. 인간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죄악의 실체가 그러하다. 신앙양심이 살아 있고, 이성적 판단과 사회규범이 바르게 서 있을 때 죄악은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신앙양심이 무너졌다 하면 그 순간 우리 내부의 죄악은 바이러스처럼 번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 풍조를 공기처럼 마시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한다. 그렇게 하여 죄악에 자신의 양심을 내준다.

그렇다면 죄악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희망은 없는 것인가? 이사야의 말을 들어본다. “주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사 59:1-2/표준) 이사야는 백성들의 죄를 질책하면서 ‘너희’에 초점을 두지 않고, 너희 ‘죄악’에 두고 있다.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너희’가 아니라, 너희 ‘죄’로 읽혀지는 표현이다. 비록 백성들의 죄가 막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가까이 있음을 이사야는 믿고 싶었던 것이다.

이사야가 적시한 ‘죄’는 ‘갈라놓는 자’ ‘분리자’이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외면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양심의 빛을 가린다는 것이다.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죄인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을 분간하지 못한다. 빛이 가려진 곳에서 백성들은 “소경 같이 담을 더듬으며” “곰 같이 부르짖”(사 59:10-11)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될까 두렵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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