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지적했듯이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영성, 성령운동은 억압당하는 자를 위해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몰각시켰다. 부흥사들이 주도하는 부흥성회, 방언과 치유를 영성운동 또는 성령의 역사로 착각했다. 따라서 ‘굿당’과 ‘신당’으로 변질되어 버린 교회의 강단에서는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신학적 전통에 있어서 성령은 교회의 영, 즉 신앙공동체의 영으로써 인간 내부로부터 역사하심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을 새롭게 하는 새 인간, 새 생명의 근원이 된다. 그것은 피억압자들의 외침으로부터 새롭게 표출되어 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몰각하고, 기복신앙과 축복, 하나님의 섭리를 내세운 것을 마치 영성운동, 성령의 역사로 착각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은 진리의 영, 혀의 능력으로서 눌린 자들로 하여금 말하고, 예언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강림과 초대교회의 선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는 징조를 고난당하는 민족의 내부로부터 이끌어내며, 이들의 언어와 종교, 문화의 언어로 예언자적인 의미로서 해석해 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성령은 억압당하는 가난한 민족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인간성 안에서 새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탄식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억압당하는 자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하고, 부자들의 기도소리만 듣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은 한국개신교가 1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서양지배자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여기에다 남성중심의 봉건주의 사상이 큰 몫을 했다.

때문에 한국개신교의 여성들은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고하며, 개인적인 구원, 가족의 구원, 민족의 구원, 한국교회의 변화를 간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눌린 자들의 간절한 기도는 민족을 구원하고,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하는데 원동력이 됐다. 한마디로 가난하고, 천박하고, 고난당하며, 눌린 자들은 한국교회 성장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가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선교를 충실히 감당했을 당시 크게 성장했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회도 이제 가진 자들이 대접을 받고, 서양문화와 지배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인사들이 환영을 받는 세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영성 및 부흥사단체 대부분은, 부흥사 및 영성운동가들의 집회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교인들의 지친 마음과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복음의 소리, 성령의 역사가 아닌, 돈의 소리만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러한 단체들은 개인의 욕망,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성령은 새로운 인간, 교회의 영으로써 인간 내부에서 역사하신다”

성령, 진리의 영, 혀의 능력으로서 눌린 자 스스로 말하고, 예언케 해야
한국개신교 처음부터 정치적 중립 내세워 고난당하는 사람의 성령 몰각

고난당하는 자를 외면한 성령(?)

이렇게 한국교회가 복음의 본질, 성령의 역사를 왜곡하면서, 아니 부자들의 교회로 변질되면서, 부자가 되면서,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몰각되고, 맘몬과 바벨의 노랫소리만 들려오고 있다. 때문에 성서의 기록대로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할 때마다, 고난당하는 사람, 눌린 자들 중에서 나타난 예언자의 목소리가 그립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눌린 자,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한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영미선교사들이 성령의 역사를 증언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일본지배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세력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실 영미선교사들은 정치적 중립, 혹은 정치 불간섭의 원칙을 주장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지지하는 편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일본과 결탁,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편에서 이를 합리화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민족의 독립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한민족의 항일운동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것은 게일 선교사의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자기 나름대로의 애국주의의 광기가 휩쓸고 있다. (중략) 자살, 자해, 게일라식 봉기와 냉혈적인 저항이 만연하다.”

한마디로 영미선교사 대부분은 조선의 고난당하는 민족과 억눌린 자들을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증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영미선교사들은 가난하고, 천박한 조선의 백성들을 향하여 ‘하늘의 뜻’, ‘축복’, ‘기복신앙’만을 강조하는 싸구려 복음을 전파했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영성, 아니 성령이란 이름으로 ‘하늘의 뜻’, ‘축복’, ‘기복신앙’을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사실 영미선교사들은 처음 한국에 들어와 피압박민족의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를 증언하기는커녕, 가난하고 천박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회개운동도 일으켰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까지 한국교회는 영미선교사들의 주도로 대부흥운동을 벌여, 교인을 배가시켰다.

이 대부흥운동 역시 모든 조선의 백성이 일본을 향한 반일감정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는데 한국교회는 자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가난한 조선의 백성들이 교회로 몰려온 것은 민족적, 개인적인 구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서양문명과의 접촉을 위한 하나의 창구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사회문제를 비롯하여 민족문제, 국제문제 등에서 자연스럽게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구원의 영성, 민족의 문제 몰각

이렇게 영미선교사들은 조선인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모든 노력을 동원했다. 이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민족구원에 무디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비롯한 105인 사건 등의 독립운동은,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평가하기보다는, 서울에서 유학하다가 동맹휴업으로 고향에 내려온 학생과 기독여성, 지식인들이 교회의 조직을 이용해 벌인 민족주의적 해방운동이다.

영미선교사들이 정치적 중립을 강하게 제기하고, 한국교회가 민족적인 문제와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 몰각하면서, 192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성장에 위기를 맞았다. 한마디로 구원의 영성이 민족적 또 사회적인 문제들과 유리되면서, 고난당하는 사람, 눌린 자들의 가운데서 일어나야 할 영성, 성령운동은 추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눌린 자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일본의 식민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했으며, 교회의 강단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각인시키는 대신, ‘축복’만을 강조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해방이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영향과 결부되어 있다. 일본패망과 함께 해방된 한국민족, 특히 기독교인들은 미국을 민족의 해방자로 신뢰했다. 기독교의 반공사상은 기독교인들이 무조건 미국편이 되도록 이끌었다. 또한 이것은 이승만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대로 이끌었다.

분명한 것은 가난한 한국백성들은 해방과 6.26전쟁, 가난과 질병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의 한복판에서 정신적 위안과 구원을 구하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다. 거기에는 미국의 구호물자와 잉여농산물이 한 몫을 했다. 또한 복음의 영성이 기독교인에 의해서 서양 혹은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질적 축복의 욕구를 부채질

60대 이후 80년대까지 한국교회는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크게 성장했다. 부익부, 빈익빈 형상은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은 정신적 위안을 위해 교회를 찾았다. 교회로 몰려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가 구원에 대한 정신적 갈망과 물질적 축복의 욕구와 뒤섞여 있었다. 물질적 번영과 결부된 영성은 성령폭발로 명명되었다. 이것은 1970년대 부흥운동들의 원동력이었다.

치유와 방언은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중에서 유행하는 성령의 표징으로서 받아들였다. 이 표징은 이들에게는 영적위안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 보수주의자, 빗나간 영성운동가와 부흥사들에 의해서 잘못 인도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마음 가운데서 움직이지 않는 영성은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부유한 서양 크리스찬 국가들이 바로 크리스찬 영성의 세속적 모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부유한 서양의 크리스찬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도, 바로 그들 지배자의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심성을 그리스도의 선교에 담아내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의 영성운동도 변해야 한다. 성령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한의 소리’를 듣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성령은 사회, 경제, 정치 등 불의한 자들의 한복판에서 탄식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제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넘어 영적인 자유, 새로운 교회(신앙공동체)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권력욕, 소유욕, 명예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럼에도 저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영원한 것이라고 계속 선포한다면, 그 타계성은 ‘종교가 아편’에 불과하다. 복음은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인간의 구원을 도래케 하는 고난에 자발적인 참여를 가능케 하며, 그리고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며, 성서가 내포하고 있는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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