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출애굽한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날그날 내려주는 만나만을 먹다보니 입에서 신물이 났던 모양이다. 고기가 먹고 싶었다. 신선한 야채도 먹고 싶었다(민 11:5-6). 마침내 온 백성의 신세타령 소리가 모세의 귀에까지 들렸다.

모세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다. 이집트에서 고기와 생선, 오이, 파, 마늘 등 부식거리를 먹기는 했겠지만, 노예나 진배없는 하층민으로서 얼마나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마치 이집트에서는 풍족하게 먹었던 것처럼 간사한 혀를 놀리다니, 사정이 이리되자 모세까지 하나님을 원망한다(민 11:14). 왜 나한테 그런 것까지 책임지우는 것이냐는 하소연이다.

차라리 ‘나를 빨리 죽게 해서 이런 꼴을 보지 않게’해달라고까지 한다. 평소 생각하는 ‘위대한’모세가 아니다. 백성과 지도자 가릴 것 없이 여전히 죄악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진노의 불(민 11:1-2)을 달고 살았던 것이다.

우상은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려는 데서 발호한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로마서 1:18-25절을 강해하면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의 가장 높은 자리에 할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높은 곳에 ‘모신’것으로 여긴다. 하나님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사물들과 동등한 자리에 ‘두는’것이다.”

하나님을 사물과 동등한 자리에 두는 것, 즉 하나님을 확실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앞장서 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을 수 없었던 연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불러들이는 죄악의 성정은 죽음으로서만이 그 값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뼛속까지 굳어버린 죄악의 성정을 다스릴 수 없다. 내 죄를 대신 지신 십자가 사랑만이 죄악의 성정을 다스릴 수 있다. 십자가 없이 구원은 없다. 삼일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