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들을 남기고 암으로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적은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예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와의 일이다. 요가와 명상으로 숨을 깊이 들이쉬며 빚 갚는 방법을 상상하거나 언젠가는 이런 돈 문제 따위는 다 지나간 일이 될 거라고 스스로에게 매일 속삭이는 것이었다.매일 똑같이. 보다 못해 여자 친구의 재정 상태를 살펴보고 알아낸 사실은 다섯 달 동안 화요일 저녁 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모두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포시는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요가나 명상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먼저 병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느냐고. 그녀의 병은 그녀가 안고 있는 빚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요가를 쉬고 그 시간에 일을 했고, 빚을 다 갚은 후에는 요가수업에 들어가서 이번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서점에 가면 “다 괜찮다”라는 분위기의 제목이 눈에 띄는가하면, “해보라,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라는 분위기의 제목이 들어온다. 젊은이들은 서가에서 이런 책과 저런 책을 집어들고 마치 문제가 다 해결된 것 같은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포시와 여자친구의 사이처럼 직설적으로 문제를 드러내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우정이 아쉽기도 하지만, 요즘 세상에 만연된 긍정산업도 문제이다. 학계에서도 세력이 커진 마틴 셀리그먼을 위시한 긍정심리학이나 행복심리학은 동기유발산업의 전례를 따라 업계에 진출한 사례다. 일부러 팔지 않아도 팔린다. 위기와 역경 속에서도 더 번창한다.

긍정심리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학생과 선생 사이도 문제다. 특히 학생들의 평가가 교수 업적에 반영되는 요즘 더 의식을 하게 된다는 고백을 듣는다. 학생들을 만나 상담을 하게 되면 미묘한 딜레마에 빠지게 될 때가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하면 ‘허허’거리고 웃을 수 있지만 그건 그때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허할 때가 많았다. 정신 차리도록 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 시점에 흔들린 경우다. 부끄러운 것은 대화하는 순간의 인기를 의식하는 속내를 발견할 때였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후로 학생상담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상태로 지내는 것은 아니라는 심중을 가지고 온 학생에게 방향을 제대로 잡으라는 이야기를 선배로서 해야 한다고 분명히 생각한다. ‘나는 제대로 했던가, 말하면 나도 앞으로 그래야 하는데...’하는 생각과 ‘굳이 센소리 하면서 너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무거워질 것 없다’는 안일한 생각들이 가로막을 때 부끄럽기 때문이다. 감정으로 덮지 말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가다듬어야 한다.

의사로서 환자를 만나는 의사도 마찬가지다. 스마일과 만족을 강조하는 부류의 경영학이 의료에 깊숙이 들어와 환자를 고객으로 대하고 무조건 친절하라고 하는 상황에서다. 환자와 가족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른 소리를 하기 어려워할 때가 있다고 호소하는 의사들이 있다.

포시 박사의 외과 주치의가 포시에게 했던 이야기에는, 긍정과 웃음이 강요되어 오히려 불편한 경우를 토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환자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고,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치료 효과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있는 걸 보면 안쓰럽고 화가 난다고 했다. 육체적 고통으로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까닭을, 자신들이 충분히 낙관적이지 못해서라고 여기는 환자들을 보면 안타깝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철학자와 자기계발서적이 있는가하면, 뭐든지 할 수 있고 나보다 못한 형편의 사람도 다 해낸다고 하는 책들도 많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중심을 잡아줄 것인가. 이 시대에 어른은 더 많이 필요하다. 원래 완벽하고 원래 고상한 인생의 선배가 아니라 갈팡질팡하는 후배를 만나 경험을 나누고 필요한 대로 따끔하게 야단치기도 하는 선배가 모든 방면에서 필요하다. 방어적으로 비관하는 자세나 행동 없이 도피적인 낙관주의 쪽으로 휩쓸리지 않도록 일러줄 인생과 신앙과 학문의 선배와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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