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작금에 우리의 현실은 말 그대로 갈팡질팡, 혼돈, 어수선 등에 매몰되어 감을 부정할 수 없다. 거짓과 진실, 따라서 “진실 게임”이라는 용어가 화두 중의 화두가 되고 있기에, 정직이란 말 조차 거론하기가 두렵다.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지나 않을까 두려워서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가 여행 중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곱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병색이 짙은 얼굴로 백합수가 놓인 가방을 갖고 싶어서 어머니를 조르다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당황하는 중에 톨스토이는 소녀에게 말했다“얘야, 사흘만 기다려 줄 수 있겠니? 사흘 후에 내가 틀림없이 이 가방을 네게 갖다 주마 자, 착하지, 울지 마라” 사흘이 지난 저녁 때, 톨스토이는 다시 그 시골 마을로 돌아와 소녀의 집을 찾았으나 소녀는 병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방금 소녀의 장례를 끝낸 집안은 온통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톨스토이는 소녀의 무덤까지 안내를 부탁했고, 소녀의 묘지에 당도한 톨스토이는 갖고 온 가방을 무덤 앞에 놓고 엄숙한 기도를 드렸다. 그 모습을 본 소녀의 어머니는“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애가 죽었으니 그 가방을 도로 갖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이 때 톨스토이는“아닙니다. 비록 따님은 죽었지만 저의 약속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엄숙히 머리를 숙이니 소녀의 어머니에게서는 새로운 눈물이 넘쳐흘렀다(감동을 주는 바보 1996).

정치, 경제 등 우리의 생활에는 수많은 약속들을 대하게 된다. 국가 간의 약속, 단체 간의 약속, 개인 간의 약속, 그러한 약속들이 때론 맹세하건데, 틀림없이 등의 용어들로 표현되어지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강조 어들의 결국은 실패로 끝이 나는 경우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그래서일까 “토마스 브룩스”는 “맹세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것이 낫고, 거짓말 하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함으로 그러한 거짓된 약속들을 금할 것을 표현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더욱 엄히 증거 한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그러나 그러한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약속? 정직? 신의가 뭐 대수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며 엉뚱한 아량을 표현하며 거짓과 불의를 희석시키는 여유를 보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무서운 죄악을 합리화 시키는 두려움을 갖게 함을 왜 모를까? 과연 그러한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적용 될까? 물론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보다는 도저히 제거 할 수 없는 죄악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시51:5 참조)

그럼으로 “하나의 죄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둘, 셋의 죄에 연류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죄(악)를 범하고서도 범하지 않은 것처럼 감추거나, 가장함은 물론 아예 무감각한 것이다.

그러나 고사에 ”사지(四知)“ 곧 말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안다“는 말이 있으며, 사람들에게는 숨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청교도명언사전 엠마오 1992년)” 라는 등의 말을 웃어넘길 수많은 없지 않은가?

따라서 “절망은 완전히 죽은 소망이고, 철면피는 완전히 미친 소망이다.”는 ‘토마스 아담스’의 말을 떠올려 보지만, 괜히 거들다가 “미친놈” 이라는 소리나 듣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 속에 “도대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라는 질문 속에 하나님 앞에 눈물의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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