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 장애인의 날. 아침부터 잔뜩 흐린 하늘은 장애인의 마음을 아는 듯 눈물을 뿌렸다. 종로 한복판을 행진하는 장애인들의 평등사회를 향한 절규가 하늘을 찌른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살아가기란 막막한 것이 현실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편견은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사회와 동화되기 어렵게 만드는 철옹성 같은 벽이다. 특히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정책은 한시라도 빨리 개선되어야할 숙제로 남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변화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장애인 복지법을 비롯해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 구제에 관한 법률, 장애아동 복지지원법 등 장애인 관련 12개의 법률이 제정됐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법률이 준비 중에 있다. 물론 모든 면에서 성에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변화의 모습이 감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교회만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정책에서 큰 전진을 이루지 못한 채 같은 곳만 맴돌 뿐이다. 장애인들을 같은 공동체로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구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단순히 그들을 돕는다는 명목 하에 편견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물리적으로도 교회의 문턱은 여전히 장애인들에게는 접근이 쉽지 않은 요새로 인식되고 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의 장애인은 동등한 인격으로서의 위치가 아닌, 단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치부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설교나 대화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호칭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며, 교회가 장애인을 위한 사역을 하는 것은 단지 장애인시설을 찾아가 생색을 내는 것이 전부다. 몇몇 교회에서 1년에 한 번 장애인주일을 지켜는 것이 큰 뉴스거리가 된 것만 봐도 한국교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간다.

이는 2000년 전 이스라엘에 나타난 장애인 차별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철저히 성경을 무시하는 태도임에 틀림없다. 성경에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해 교회를 향해 이들을 보살피도록 명령했다. 특히 신구약 전체를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시각은 분명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는 중도 시각장애인이 된 삼손(삿16:28-31)을 통해 블레셋을 멸망시킬 뿐 아니라,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 축복을 하도록 하고(창27:1, 21-23), 중도 지체장애인이 된 야곱을 통해 비로소 ‘이스라엘(창32:24-28)’이라는 축복의 이름이 주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덧붙여 마지막 날에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바로 장애인(사35:6)임을 선포한 것도 장애인에 대해 한국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 사회에서는 장애가 존재했지만, 예수님에게는 장애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장애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누구보다 우선 사랑과 인격으로 대했다. 예수님에게 장애인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각기 다르게 창조한 독특한 존재일 뿐이었다.

이처럼 한국교회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장애인과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단순히 도움을 주거나 보살펴야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걸어야 한다.

한국교회봉사단이 몇 해 전 발표한 장애일주일 선언문처럼 한국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장애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통로로 고백하고,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의 장애인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장애인이 장애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를 만들고,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정서적으로 장애를 경험하게 하는 모든 구조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이와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장애인이 우선되는 교회 공동체를 지향하고, 장애인이 없는 교회를 비정상적인 교회라고 고백하고 장애인과 함께하는 교회만이 성경적인 교회임을 선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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