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주는 주체적 교육

이집트 파라오의 억압과 노예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은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를 못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억눌려 살았던 사람들의 훈련과 교육이었다. 한마디로 주체성과 연대성을 갖게 하는 훈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광야에 들어간 히브리인들은 강한 적들과 싸워 보려는 주체적인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가로 막힌 산을 무너트릴 기백도 없었다. 적들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자신들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바로 노예근성이다.

서로 단합해서 위험을 무릎 쓰고 공동의 목표, 자유롭고 평등한 새 나라를 이루자는 생각보다는 제 한 목숨, 제 아내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앞섰다. 연대의식보다 개인의 생존에 더 집착하는 것도 노예근성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공동체를 이루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준엄한 선언을 했다.

“너희들은 죽어 시체가 되어 이 광야에 쓰러지고 말리라 그리고 너희의 자식들은 너희의 배신 죄를 짊어지고 너희의 시체가 썩어 없어질 때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야 한다”

히브리인들의 노예근성은 한마디로 패배자로서, 좌절자로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를 못했고,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들과 함께 광야에서 다툼과 갈등을 계속해서 벌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불평불만을 드러내며, 이집트 파라오 밑으로 다시 들어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을 들어주면서도, 그들을 버리고, 나아가 몰살시키겠다고 단언했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 백성들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 대한민국의 백성들은 일제 36년의 식민지 생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민족과 똑같은 고통과 좌절을 겪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쉽게 동화되고, 일본의 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했다. 남학생들은 일본군에 입대해 독립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여성들은 정신대로 끌려가 모진 고난을 당했다. 그리고 조선의 교회지도자와 지식인들은 조선의 청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데 앞장섰다. 오늘 한국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계가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한국기독교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의 범죄를 저질렀다.

이 같은 범죄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를 교육하고, 훈련해야 할 한국교회는, 헌금을 많이 내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영(성령)을 오도하며, 가식적인 기도를 하는 교인들이 마치 참 그리스도인 인양 교인들을 교육하는 목회자들의 모습은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가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선교 초기 조선의 백성에게 마지막 희망으로 떠올랐던 기독교가 오늘날 자신의 등에는 짐을 짓지 않고, 교회건물 위에 십자가를 높이는 데에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를 교육하는 대신,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이름을 내세워 맘몬과 바벨의 상징인 헌금만을 강요하며, 이것이 신앙생활의 척도, 믿음의 척도로 교육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이다. 한국교회 교육의 핵심이 헌금에 맞추어지면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교인들의 가정은 신앙의 가정이라고 보기보다도, 범죄자들의 소굴로 변질되고 있다. 오늘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범죄현장 중심에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한국교회 교육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과 교육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평등의 공동체 창조

범죄의 소굴로 변질된 교회 광야서 다시 시작해야
하나님의 생명력 흘러넘치는 신앙공동체 회복 절실

피압박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교육

그렇다. 교회는 사기꾼들의 비자금을 세탁하는 장소, 아니 목사의 비자금을 형성하는 잘못된 신앙공동체로 빠르게 타락하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와, 그리고 평화의 교육은 한마디로 실종되었다. 목회자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은 제쳐 두고라도, 절도를 비롯한 목회자의 보이스피싱 연루, 국가를 상대로 사기, 전철 안에서의 여성을 상대로 한 ‘몰카’ 범죄 및 성추행, 목회자가 가난한 목회자와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 등등의 범죄가 끊이지를 않고 있다. 심지어 존속살인도 교인들의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다는데 문제가 심각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목회자의 범죄가 각종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한국기독교가 더 이상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를 살려보겠다는 심정으로 모세와 같은 교회지도자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구약성서는 모세를 가장 성숙한 존재로 기록하고 있다. 에집트의 노예생활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는 꾸짖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고, 다독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다가 지친 하나님이 그들과 관계를 끊어버리겠다고 토라지면, 애걸복걸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루 15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했다. 잠자리도 편치 않았다. 지배자들의 학대를 받으며 살자니 노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진정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면, 그들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이라면,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그들과 씨름하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의 교육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된 나라의 참된 주인으로 교육시켰다. 이것은 분명 피압박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교육과 훈련과정이다. 역사의 현실이 냉엄하듯이 하나님의 교육과 훈련도 냉엄했다. 광야에서의 교육과 훈련은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롭게 형성하는 창조의 현장이었다. 광야, 아니 빈들은 텅 비어 있기 곳이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음란과 물질주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호세아는 광야로 나가자고 호소했다. 한마디로 광야로 나가 하나님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다.

세례요한도 오랜 침묵을 깨고 새 시대를 열었으며,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고 악마들과 씨름한 이후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욕심을 부릴 것도, 빼앗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허영심이 허망하다는 것을 광야에서 깨달은 것이다. 또 광야는 지배자들이 지배욕과 탐욕을 버리고,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박재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1988년, 도서출판 천지)에서 “광야는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고, 부패한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곳이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변혁의 힘이 생기는 곳”이라면서, “오늘날 광야는 돈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곳이다.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광야를 열어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 성서적 교육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때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했다. 박재순 교수가 물량주의와 맘몬주의에 빠져 범죄를 저지르는 한국기독교인들을 향해 광야로 돌아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교육해야 한다. 한국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간에 화해하는 방법,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노예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교육과 패배의식에서 벗어나는 교육과 훈련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한 이 땅의 그리스도인,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어떤 강도 건널 수 있고, 어떤 산도 넘을 수 있다. 그리고 쓰러지더라도 죽지 않았으면 일어나야 한다. 또 여러 번 넘어지더라도 시체가 아니라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산자의 하나님이다. 기독교인들은 새 나라를 향한 광야의 행진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것만이 고난의 길을 걸으며,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민족 아니 세계민족이 사는 방법이며, 범죄자의 소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신앙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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