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순 목사는 자신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1988년, 도서출판 천지)에서,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단정했다. 그것은 ‘구약성서’는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과 시련을 주제로 해서 생겨났고, ‘신약성서’는 가난한 민중들이 주인이 되는 하나님나라 운동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셨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신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라는 말은 어떤 민족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신구약성서가 세계 모든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분명 고대철학이나, 유교사상과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대철학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것이 아니라, 조화 있고, 질서 있는 고상한 삶을 추구했다. 유교는 어떻게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춘 지배층의 사상이다. 그리고 불교와 힌두교는 어떻게 하면 깨끗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마디로 개인의 정신적인 평화를 얻기 위해 도덕적, 종교적 수행에 힘쓴다. 불교 역시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고통에 대해서 문제를 삼지 않는다. 인간의 무지와 탐욕, 그리고 노여움을 어떻게 극복하여 정신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화되는 것이며, 희망의 종교, 생명의 종교, 평화의 종교, 사랑의 종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헌데 이러한 성서가 왜곡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책인 성서가 변질돼 부자들을 위한 책으로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로마로 건너가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건너가 문화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기업이 되었다. 마지막 한국으로 건너와 대기업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십자가탑은 부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며, 교회는 부자들을 위한 종교로 변질되었다. 한마디로 부자들이 주인이 되고, 부자들이 행복한 세상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말과 상치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포는 분명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역사의 주체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것이다”, “너희가 학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 “너희는 바로 내 형제이며, 자매들이다”

한국교회가 성서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죄’이다. 또한 하나님을 떠나서 제멋대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다. 여기에서의 회개는 동료들과의 연대성 회복이며, 역사적이며, 주체적인 사회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성서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인간다움의 상실이며, 생명의 기쁨의 상실이다. 또 사랑의 일치를 상실한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소외는 참된 주체성의 상실이기도 하다. 이 죄로 인하여 역사는 타락하고, 사회의 구조악이 조성된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생각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한국교회가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기에 바쁜 나머지 성서에 나타난 참뜻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의 사랑, 생명, 평화운동에 참여하지를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의위상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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