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병환 FC는 생활이 힘들어지면 쉽게 해약하는 과도한 보험이 아닌, 싸지만 보장은 큰 보험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너무 일찍 죽을 것을 염려하여 보험에 가입하고, 너무 오래 살 것을 염려하여 연금에 가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는 기독교인에게 삶과 죽음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요? 헌금을 하고 이웃을 위해 기부해야 할 돈이 아프지 않으면 한 푼도 못 돌려받는 보험에 들어가거나, 해약하면 원금도 못 찾는 연금에 들어가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이처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가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여, 보험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인색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보험료가 버려지는 돈, 보험설계사가 지인들 소중한 돈을 빼앗는 악인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보험설계사로, 재무설계사로 일하고 있을까요?
물론 거기에는 큰 계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기적으로 인해 기독교인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재무설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내 생각이 바뀐 계기에 대해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살 되던 해, 여름.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의 일이다. 형들은 학교에 가고, 아버지는 직장에 가신 점심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빨래를 삶기 위해 오래된 석유풍로에 불을 붙이고 있었고, 어머니 껌 딱지였던 나는 그 옆에서 놀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로 인해 점화가 된 걸 모르는 상태에서 석유를 채우다 불이 났다. 어머니 치마에 옮겨 붙은 불은 삽시간에 부엌을 채웠다. 어머니께서는 겨우 불 속을 뚫고 나오셨다가, 울고 있는 나를 보시고 다시 부엌에 뛰어들었다. 어머니와 내가 불 속을 빠져 나왔을 때 이웃들과 소방관들이 달려왔고, 부엌은 전소됐지만 다행히 다른 방으로 불이 옮겨 붙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신체의 30% 가까이 화상을 입은 나와 어머니는 화기를 막기 위해 한 달여간 당시 유일하게 에어컨이 작동되는 특실에서 지냈다. 다행히 어머니와 나 모두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더 힘든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상을 입어 못 쓰게 된 피부를 걷어내고 엉덩이와 허벅지 피부를 팔과 다리에 이식하는 수술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식한 피부가 제대로 붙지 못해 썩게 되는 일이 거듭되었다. 그래서 썩은 살을 긁어내고 새 살을 이식하기를 수 차례 반복했다. 당시는 마취 기술도 발달하지 못해서 아직 어린 아이를 마취하고 수술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모든 수술은 마취하지 못한 채 진행되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잘 놀다가도 이동 침상 끄는 소리만 들리면 자지러지게 울었다고 한다. “팔은 하지 말고, 다리만 해요.”라고 소리치면서.

어머니와 내가 병상에서 싸우는 사이, 우리 가족은 더 큰 싸움을 하고 있었다. 보험 하나 가입할 수 없었던 형편 때문에 아버지는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이모들은 학교 다니던 두 형들 밥해주고 간병에 매달렸고, 당시 장사를 하시던 외할머니는 딸과 손주를 살리기 위해 대부분의 재산을 사용하셨다.

당시 같은 병실에 있던 외국인 선교사가 너무 힘들어하는 우리 가족을 보고 날 입양하려고도 했다. 자신의 나라로 데려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우리 가족은 날 보내지 않았다. 만약 그 때 날 보내셨다면 서로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

차마 날 보낼 수 없어 거절하셨지만, 더 이상의 치료비를 만들 수도 없었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나는 6개월의 병원 생활 끝에 퇴원했다. 어머니는 관절 부위에 화상을 입어 팔을 머리까지 들 수 없었다. 그래서 머리도 못 감는 생활을 해야 했고, 나는 자라면서 늘어나야 하는 관절 부위 피부에 화상을 입었기 때문에 몇 번에 걸쳐 피부를 째줘야 했다. 어머니는 몇 년간 팔이 불편한 채 생활하시다가 외할머니께서 겨우 마련하신 돈으로 팔꿈치를 수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불편함 없이 생활하신다.

그 후 십 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에 사고 전 수준의 생활이 가능해졌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그 해 겨울, 외할머니께서 설날을 앞두고 손주들 먹일 떡을 머리에 이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뇌출혈이었다. 깨어나지 못하신 채 누워계신 외할머니 병상 창가에 까치가 앉아있던 것이 기억난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외할머니께서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풍으로 반신은 사용하지 못하셨지만 의식은 있으셨고, 내 손을 꼭 잡아 주시며 미소 지으셨다. 사실 찡그린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너무 따뜻했다.

점차 회복되어 가신다는 소식에 일상의 평온을 되찾을 즈음, 외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외할머니께서 치료를 거부하셔서 위독해 지셨다고 했다. 모두들 외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외할머니의 의지는 확고하셨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에서 어른들은 외할머니께서 자존심이 강하셔서 포기하셨다고 했다. 십 수년이 흐르는 동안 그렇게만 알고 있었고, 가끔 꿈속에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보이실 때면 항상 웃는 얼굴이셨다. 천국에서 편안하게 지내시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러던 중 중환자실 입원비가 하루에 50~70만원이라는 신문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외할머니께서 자식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그런 힘든 선택을 하셨다는 것을. 서둘러 어머니의 보험을 확인했다. 못난 자식이라 어머니께 불행이 닥쳤을 때 지켜드릴 만큼의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보험은 만기되어 효력이 없었다. 실비 보험 정도는 남아있었지만, 연세가 있어서 종신보험 가입이 불가능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권사님인 어머니께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기독교인으로써 치료를 포기하신다는 것은 더 큰 고통일 수 있었다.

심지가 약한 나로써는 이런 상황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했다. 만약의 상황에 닥쳤을 때 어머님이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외할머니께서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셨던 따님의 삶을 지켜드릴 수 있도록 더 많은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혹시 지금 이런 상황에 닥친 교인이 우리 주변에 있지는 않습니까? 가족들의 생활비를 위해 본인의 보험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 더 큰 피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제 보험이 없었기 때문에 온 가족이 10여 년간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만약 저에게 그렇게 많은 치료비가 사용되지 않았다면 외할머니께서 충분히 치료 받으실 수 있는 자금이 준비되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 충분한 보장 내용의 보험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이런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그러려면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과도하게 준비한 보험은 생활이 힘들어지면 쉽게 해약하게 됩니다. 언제 사고가 닥칠 지 모르는데 형편에 따라 보험이 있다가 없다가 하면 안됩니다.

그럼 해결책이 있을까요? 네. 간단합니다. 가장 싸지만 보장은 큰 보험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보험이 제가 소속된 회사의 보험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가 최저 금액에 큰 보장을 갖춘 보험이라고 했을 때 그냥 믿을 수 있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걸 판단하고 여러분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스스로 보는 방법을 익히셔야 합니다.

문의 010-7171-7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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