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던 생명 죽은 영혼에 비추신
주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가득한 어둠 메마른 땅 비추신
주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주님 그 손 펼치사 만지시고 안으셔서 깨우셨네
주님 그 손 펼치사 세우시고 비추어 계획했네

주님의 그 사랑 십자가의 사랑
우릴 통해 비추시네 비추시네
주님의 그 사랑 십자가의 그 사랑
우릴 통해 우릴 통해 비추시네 그 빛 비추시네
그 빛 비추시네

▲ 정 재 영 장로
내용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어둠이 가득하고 메마른 땅에 비추고 있다는 것과 그 사랑을 주시는 목적은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깨우려는 계획이라는 것으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우리를 통해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빛은 사랑의 빛이다. 그 사랑의 빛은 십자가를 통해 발산된다. 발산된 빛은 우리가 받아 반사하듯 다시 비추는 것으로, 빛의 특성을 통해 말하고 있다. 결국 우리 기독인도 십자가의 사랑을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삼단논법으로 변증하고 있다.

원래 빛은 창조 시 첫 번째로 만들어졌다. 물론 태양에서 나오는 빛은 3일째다. 당연히 첫날의 빛과 3일째의 빛은 서로 다른 빛이다. 빛 되신 주님은 첫날의 빛이고 그 빛을 받아 다시 비추는 빛은 태양과 달의 관계와 같다. 주님은 광원이시고, 우리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가진 빛이라 짐작된다. 주님이 죽으셨을 때 대명천지가 어둠의 천지가 된 사건도 동일하게 해석되는 부분이다.

빛의 성질을 살피자니 저절로 밀턴의 <실낙원>이 생각난다. 지옥편을 보면 지옥에 있는 불은 열기는 강열하나 빛이 없다. 세상의 불은 빛이 있으나 지옥의 불은 빛이 없는 어둠의 빛이다. 그런 상상을 연장해 본다면 빛이 없는 곳은 깊은 지옥이다. 세상에서 태양빛이나 전기 빛이 있는 장소라도 주님의 빛이 없는 곳은 어둠이며,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여기서 기독인의 가치가 발견된다. 왜냐면 주님의 빛을 가진 기독인이 있는 곳은 태양과 같은 천국의 빛을 생산하는 발전소로 변환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빛과 소금’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기독인은 주님의 빛을 품어 다시 비추는 기능이다.

이 작품에서 ‘십자가의 사랑의 빛’과 ‘우릴’ 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이것은 기독인의 사명을 강조하고자 의도적으로 반복 사용한 시인의 의도적 목적을 보여준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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