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한 20여 년 전 자가용 붐이 막 일어나던 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차량 꽁무니에 익투스라는 헬라어가 새겨진 물고기 모양의 표식을 너나 할 것 없이 달고 다니는 신드롬이 있었다. 나는 크리스찬이요 라는 표식도 표식이지만 차량 소유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남보다 일찍 차량을 가지게 된 기분을 아마도 물고기 모양 표시로 여러 가지 감정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그 물고기 모양의 표시를 달기 전에는 그 차량을 운전하는 분이 기독교인, 불교인, 천주교인, 무종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천주교인들은 천주교의 변형된 십자가 로고와 함께 “내 탓이요” 라는 스티커를 차량 앞뒤로 부착해서 차량 소유자의 종교가 무엇인지 드러내기도 했으며, 거기다가 불교도들도 차량 운전대 유리창에 연등모양의 악세사리를 달고 다니기도 하고 차량 앞뒤로 소속 사찰의 표시를 부착하기도 했다. 자가용이 막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던 시대에 종교를 가진 신자들은 은근히 자신의 종교를 차량을 통해 자랑하던 시기였다. 이는 유행처럼 번져 너도나도 차량 뒤꽁무니에 하나씩 붙이고 다니는 풍습을 보였는데 요사이는 가끔 눈에 띌 정도다.

문제는 이러한 종교인의 표시를 다는 것 까지는 누가 말릴 수 없는 순전한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고 보지만, 표시를 단 만큼 종교인의 책임이 뒤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이 발견된다. 분명 교통 신호등이 붉은 색인데 무엇이 그리 바쁜지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달리는 가하면, 건널목에 분명 파란 신호등인데 보행자들을 무시하고 그냥 차량을 운전해 버리는 종교인 표식을 붙인 차량들에 의해 법과 질서 의식이 사회에 본이 되지 못했다.

타 종교인들은 그 나름대로 종교 단체에서 통제를 강화하겠지만 기독교도들은 워낙 많은 교단이 있다 보니 어느 한 곳에서 만의 여론 조성으로는 불가능하다. 방법은 신앙인의 양식과 성숙한 법질서 확립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건물과 성도의 수만 자랑하지 말고 교회가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고 신앙인의 삶이 어떤가를 드러내기를 노력해야 한다. 입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운운하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영혼이 구원을 받은 신앙인이 세상에서 해야 할 신앙인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 줄 수 있도록 신앙의 성숙함을 이루어야 한다. 교회가 지금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잘 알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일예배만 드리면 기독교인의 행세를 다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독교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하지 않은 돈 안 되는 일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예수님을 믿고 영혼이 구원 받았음을 윤리와 도덕 이상의 영적인 이상을 드러내는 삶을 보여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모여 이룬 교회는 세상의 막다른 길목에 있는 파란 등불이 되어야 한다. 윤리와 도덕이 타락되고, 노인들이 푸대접을 받고, 청소년들이 배울 것이 없고, 고아와 과부가 버림받아 생활고에 시달리고, 청년 실업자가 늘어나 깊은 고민에 빠진 취업 준비생을 위해 교회는 파란신호등이 되어야 하는데도 교회는 무관심이다. 교회가 왜 세상에 존재하는가? 헌금을 왜 거두며, 교회를 무엇에 쓸려고 첨단으로 고가의 고급재료로 엄청난 투자를 해 건축을 감행 하는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온 기독교도들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직장에서 기독인의 소명을 감당하는지? 매우 궁금하다. 혹시 일요일 신자가 아닌지? 세상에는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허기져 굶주리는 무리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교회를 이룬 신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세상 어디에 내어 놓아도 기독인들은 파란신호등이 되어야 한다. 인적이 드문 이른 새벽녘에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 신호등의 불빛이 파란 등이면 통과해야 하고 붉은 불빛이면 무조건 서야 한다. 이 질서는 사회의 기본법이다. 그리고 사회의 약속이다.

만약 기독인이 아무도 지나지 않는다고 해서 붉은 불빛의 신호등이 켜져 있는 데도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 자를 기독인이라 할 수 있는가? 겉으로는 십자가 목걸이, 십자가 뱃지, 차량 안 십자가 걸이, 차량 밖 물고기 표시는 자랑삼아 붙이지만, 기독교인이나 그들이 이룬 교회가 세상에서 세상 풍조에 휩쓸려 어디가 거룩하고 어디가 속된 곳인지 분간 할 수 없다면 교회를 이룬 기독교인들은 다시 거듭나야 한다. 새로워지는 방법은 교회가 가난해 지는 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양팔을 벌린 이유가 물과 피를 다 나누어 주고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닌가? 교회가 가난해지는 길 만이 파란 신호등이 되지 않을까?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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