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듯 그리움을 속삭이고 싶은 관계
가난하여도
부자인양 주머니 속 탁탁 털어 다 주고 싶어진다
더러는
제 한 몸 바쳐 사랑을 고백하고 이슬 잠긴 뒤편으로 사라진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제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고상한 것도
모든 것 다 잃고도 부자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도
사랑하면 다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긴긴 밤이 짧게 느껴지는 것과
새벽녘까지 장문의 편지를 쓰는 것도
있는 듯 없는 듯
내 가슴 안에 미소 짓고 있는 누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그렇게
꽃처럼 말하고 싶고 바람처럼 말하고 싶어 하면서도
꽃으로 지고 싶어 하는 열망에 취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다
가만히 마음 문 열고 보면
둘이면서도 하나가 되어 절명의 위기를 스스로 넘나드는 것도
사랑하면 다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 정 재 영 목사
사랑만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노래한 주제도 그리 많지 많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더욱 그렇다.

남녀 사이나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로 사랑의 성격이 각각 다르다는 면에서 구분하려 하지만, 종교대상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신앙고백이라 한다. 그것들의 실상은 모두 같은 모습과 성격을 가진다.

사랑의 바보는 사랑 앞에서 목적을 논하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을 보면 사랑은 맹목적인 바보를 만든다.

사랑과 바보관계를 잘 보여주는 성경 이야기는 사마리아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전혀 책임을 지어야 할 관계가 아니다. 더군다나 출장과 같은 길에서 통상의 자기 일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한 바보와 같은 사람으로 나오지만, 실은 가장 가치 있는 행동을 한 사람으로 나온다. 응급치료를 한 것만도 충분할 턴데 자기 업무를 마치고 다녀와서 부비가 추가되면 그것마저 지불하겠다는 정신 나간 사람과 같은 보증까지 하고 만다. 정말 바보와 같다. 이처럼 사랑은 일반사람의 가치로 보면 바보만이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바보가 되기도 하지만 사랑 자체가 바보다.

예시 앞 연에서 사회적인 신분이 다른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설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전제 위에서 온 인류를 총괄한 신앙대상에 대한 신앙인의 모습을 투영해볼 수 있다. 비신앙인이 보기에는 신앙인은 비논리성과 비이성적인 바보의 모습으로 보여 지기 마련일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 사랑을 추구하는 신앙인은 바보임이 틀림없다.

성경에서 신랑과 신부로 은유한 주님과 교회 사이의 사랑 고백, 아가서에 나오는 남녀의 사랑이야기 등은 상호 신분관계를 초월한 사랑하는 사람의 바보 같은 고백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역사적 인물 중 예수님보다 철저한 바보를 본 일이 있는가.

 한국기독교시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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