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불을 할퀴고
두 뺨을 때리면서
종점을 망각한 채 달려가던
지리한 겨울 눈바람
잦아질 날 없더니

그토록 기다렸던
춘삼월 봄바람 불어와도
봄이 봄답지 않은 것은 왜일까

늙은 지구의 모함일까
저 북녘 하늘
골골샅샅 들려오는
아사(餓死)의 신음성 때문일까

그래도
오늘 난
봄 언덕에 서서
올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상처뿐인 창백한 봄을
손짓하면 기다리고 있다

▲ 정 재 영 장로
시는 음률과 은유라는 기본적인 정의를 통해서 이 작품의 숨겨진 의미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제목이 말하는 ‘봄’과 ‘언덕’과 ‘서서’ 라는 말을 구분하여 시인의 의도와 각각의 언어 속에 감춘 의미를 살펴보자.

봄은 따듯하고, 생명이 다시 창조되고, 만물이 새롭게 시작하는 이미지를 가진 긍정적인 절기다. 그러나 첫 연의 절기 겨울은 봄과 상극적이고 대비점을 이루는 절기다. 봄은 겨울 눈바람과 다른, 귓불이나 두 뺨에서 감각하는 외부의 환경과 달리 희망을 내포하는 절기다. 2연에서는 달력상의 절기와 현실이 감각적으로 다름을 고백하고 있다. 3연에서 늙은 지구라는 말을 동원하는 이유는 각 절기의 함축성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환경적인 요소와 북녘이라는 지정학적이며 역사적인 겨울과 같은 상황을 통찰함으로 시인의 고뇌하는 원인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외부적인 요소를 초월하여 변치 않는 신념을 신앙처럼 고백하고 있다, ‘올까 말까’라는 말에서 체념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가능성을 뛰어 넘는 무의식의 신앙의 모습을 추론하게 된다.
‘봄’은 단순히 자연적인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새로움의 가능성, 즉 진정한 시대적 회복을 갈구하는 것이다. ‘언덕’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봄이 잘 조명되는 하늘과 낮은 계곡의 중간 지점의 장소인 언덕은 시인의 현재적 위치이며, 동시에 역사적 안목의 위치를 말한다. ‘서서’라는 말도 시인의 심리의 강한 의지를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시란 원래 의미를 새롭게 동원한 이미지 안에 숨기는 창조적인 작업이다. 예시처럼 단순한 절기를 역사인식의 의미로 해석하여 마침내 거대 담론으로 이끄는 묘사와 진술의 힘이 시의 중요한 심미적 요소다.

부연한다면 겨울과 봄의 양극성을 대비하는 창작 기법은 융합시론을 잘 변증해준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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