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주변에서 빨리 벗어나라

광복 70년, 건국 67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아니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체제 속에서 한국교회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한국개신교가 정권의 중심에서 독재정권을 정당화 해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민정부 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그것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극에 달했다.

한국개신교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국가주의에 굴복하면서까지 일제의 식민지를 정당화 해 주었다. 심지어 서울을 점령한 북한 김일성의 피묻은 손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다. 특히 해방 이후 이승만정권을 비롯한 군부독재, 신군부독재 정권 아래서, 이들의 정권을 유지해 주는데 그 중심에 있었다. 그것은 ‘시장경제체제에 근거한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진 보수적인 한국개신교가 이들의 독재를 정당화 해주고,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렸기 때문이 아닌가(?)

역대 대통령의 면면을 살펴보면 독재자였거나, 아니면 부정축재자들이었다. 그들의 마지막은 한결같이 비극적이었다. 보수적인 한국개신교는 이들의 독재와 부정축재를 가능케 해준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지금도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개신교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렸으며,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 성직자신뢰도 조사에서 꼴지를 차지했다.

그것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과 논의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또 이같은 논의는 한국교회사를 관통하고 있으며, 정통이 되어버렸다.

한국개신교에서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가장 보수적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국개신교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앙선교에 근거해서 ‘영혼구원’만을 가르치고, 부르짖었다.

당시 정치와 종교라고 하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행동했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아서 브라운 박사의 선교보고서도 이를 그대로 적고 있다. 미국인들의 조상이 스코틀랜드에서 지키던 신앙이론과 실천을 한국교회에서도 그대로 요구했다. 한마디로 미국에서도 요구하지 않던 보수적인 신앙실천을 한국개신교인들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그대로 뿌리를 내려 정통이 되어 버렸다.

이같은 ‘영혼구원’만을 외쳤던 한국개신교는 자연스럽게 사회와 유리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한국개신교의 신뢰도를 추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보수적인 한국개신교의 목표는 세상과 멀리하고, 영혼구원을 얻어서 하나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었다. 공동체적인 사회구원에 대해서는 매우 무관심했다. 이같은 보수주의적 신앙형태는 한국개신교의 기초가 되었다.

이는 결국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로 이어졌고, 일본 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오히려 일본 식민지를 정당화 해주는 잘못을 범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본국에 보낸 선교보고서에서 “조선의 백성은 천박하고, 미개한 반면, 일본은 선진국으로 지원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공의회 이름으로 교회의 정치참여를 금지하고, 일본의 조선 식민지를 정당화 해주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잘못을 범했다.

 
교회분열로 이어지기도

한국개신교가 그렇게 자랑하는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개신교의 탈정치화, 보수화의 기초를 형성하는 전환점이었다. 이러한 보수성은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과 충돌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그리고 내면화, 체질화되었다. 보수적인 미국의 침례교나 루터교, 장로교 역시 보수정치권의 주변에서 기생하며, 보수적인 교회들을 지탱하게 했다. 특히 이들의 지원을 받은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와 부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들의 대통령 당선은 신보수주의자인 미국보수적 교회들에게 길이 남을 쾌거이며, 승리였다. 이같은 사회성을 잃어버린 보수화는 한국교회에 그대로 이식되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교초기부터 해방까지 한국개신교는 완전하리만큼 보수주의자들의 보루였다. 간혹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일부 목사들이 한국적 상황에 맞는 신앙과 신학에 기초한 민족종교를 주창했지만, 그것은 좌절되고 말았다. 또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하지 않은 목사와 교인들은 온갖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그것도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한마디로 일본 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하고, 반사회적, 정치적인 보수 세력과의 대결은 매우 힘든 싸움이었다.

1950년대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범은 보수주의의 벽을 허무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개신교회 다수를 차지하는 한국교회 전체를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이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그 이후에도 신학적, 실천적 이유로 인해서 한국장로교회는 연쇄적인 분열이 일어났다. 그것들은 어떤 진보적인 교회갱신의 문제와 무관했다. 분열은 장로교회 안에서 보수성의 경쟁, 교회 외적인 지방색, 교회의 정치적 요인 등의 이유에서 갈라졌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개신교회는 전적으로 보수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에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해방 후 70년 동안 보수적인 정치권과 같이하면서, 충성스런 동맹세력으로 자리를 구축했다. 한국 개신교만큼 한국 정치사의 한가운데서 역대 정권의 지원자 노릇을 한 집단은 없다. 이승만대통령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개신교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부정한 방법으로 대통령이 되려고 할 때도, 교회 안에서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없었다.

1980년 군부를 장악하고, 정권을 찬탈하여 수많은 정치적 적대자들을 고문과 투옥으로 탄압했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교회의 지원은 더욱 놀라웠다. 그가 보안사령관이었을 당시 보수적인 교회지도자들은 그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 피묻은 손에 신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오히려 보수적인 한국개신교회의 일부 인사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학생들과 사회지도층인사, 그리고 종교인들을 용공 또는 좌경으로 치부했다. 이같은 시각은 역사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집단이 되었다.

보수적인 한국개신교가 전두환정권에 대해 섭섭했던 것은 그가 충실한 불교신자였다는 것과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회가 사회성을 전혀 갖지를 못했으며, 반역사적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정치적인 한국개신교는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하며, 이 땅의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선교를 감당한 교회와 인사들을 정치적으로 매도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군사독재정권의 피묻은 손을 위해 기도하며, 보수 정치세력의 주변에서 온갖 혜택을 누렸다. 오히려 이들이 정치적이었으며, ‘정교유착’의 고리를 끊지 못했다.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지원은 노태우정권 하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들 독재자들이 통치하는 동안에 보수적인 교회들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여러 차례 초대형집회가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으며 열렸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엑스포 대회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 보수적인 교회 및 단체들은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 요지에 교회당과 기도원을 건축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며, 누구도 부인하지를 않는다.

보수적인 교회, 보수정권과 연대

한마디로 한국의 보수주의적 정치체제는 그동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과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한국교회가 보수주의의 지원을 확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이 왜곡되어 악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믿음’, 그리고 ‘성령’을 내세워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왜곡했다. 심지어 ‘가난이 죄’라고 말하는 소리까지 한국개신교 안에서 나왔다.

지난해 8월 성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개신교와 교계언론은 연일 타락한 중세교회를 비판하기에 바빴다. ‘똥 묻은 돼지가 겨 묻은 돼지’를 나무라는 꼴이 되었다. 이것은 한국개신교가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나머지 사회적 약자들을 멀리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셨다는 것을 몰각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잘못은 여기에서 끝나지를 않고, 교회내적 갈등을 차제하고서라도 사회적 갈등과 지역 간의 갈등, 남북한 민족 간의 갈등, 계층 간의 갈등, 이념적인 갈등, 종교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며, 반사회적이면서, 국민통합 아니 사회통합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면서 한국개신교의 신뢰도는 땅바닥으로 추락했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의 위상도 크게 추락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교회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졌을 당시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이 가난하고 천박한 백성들을 향해 있을 때 국민들은 교회를 신뢰하고, 교회로 몰려 왔다. 그것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잃어버리고,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한 당시의 한국개신교의 성장은 크게 둔화를 보였다. 1990년도 이후 한국개신교는 부자들의 종교로 변질되었고, 맘몬을 노래하면서,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문을 닫는 교회도 점점 늘어나 매년 3000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 또한 교회를 떠난 교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교인쟁탈전도 곳곳에서 교회 간에 일어나 교회의 신뢰도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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