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적인 근본주의 극복하는 신앙적 각성 촉구
생명력 잃어가는 한국교회의 모습에 안타까움 토로

25년 만에 완간한 ‘만인보’와 대서사시 ‘백두산’으로 민족 시인의 반열에 오르고,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문학 자산인 고은 시인. 승려 출신의 이 거장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색다른 대담 프로그램이 시청자를 찾아왔다. CBS <크리스천 NOW>(연출 김동민, 진행 김응교 숙대교수)에서 시도하는 확장된 종교 간의 대화 ‘민족 시인 고은, 기독교를 말하다’가 그것이다.

△‘책의 숲’에서 만난 거장과의 대화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시인의 자택에 들어서자마자 제작진을 맞이한 것은 엄청나게 펼쳐진 ‘책의 숲’이었다. 서재 벽면 사방을 차지한 책꽂이도 모자라 방바닥과 계단에까지 쌓여있는 수천 권의 장서는 시인의 50여년 문학의 성곽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탄탄해 보이는 그 성(城)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시인의 자유를 보았다. 책상 위에 놓인 작업 노트를 보니, 놀랍게도 전단지의 이면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 들어와 있으면 어머니의 胎안에 있는 것 마냥 편안합니다. 발로 차기도 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의 문학의 태아가 숨 쉬는 곳이지요.”

신간 ‘두 세기의 달빛’ 제목에서 드러나듯, 그는 공간도 시간도 멀리 내다볼 것을 요구한다. 아파트 벽에 갇혀 내 코앞만 쳐다보는 안경잡이 초등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는 요즈음,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먼 길을 가던 원시(原始)의 시야를 복원하여 시대를 넘나드는 관점을 가져보자는 제안. 그것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현실과 초현실의 변증법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에게 문학을 통한 사회참여는 하나의 훈장처럼 여겨졌지만, 파블로 네루다를 인용하며 “리얼리즘을 모르는 것도, 리얼리즘만을 아는 것도 둘 다 바보”라는 코멘트를 통해 사회 참여에 대한 더 깊고 넓은 인식을 소개해 주었고, 자기 역사의 부정이 아닌 ‘넘어섬을 통한 승화’의 단계를 보여주었다. 유신과 5공의 엄혹한 시간 속에서도 애초부터 자신에게 현실주의와 초현실주의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는 듯.

△승려 출신 시인이 말하는 기독교
고은 시인이 바라보는 종교는 변방에서 시작됐다. 미천한 출신의 공자도, 인도 소왕국에서 열반에 오른 부처도 그랬다. 그곳에 살면 인간 취급 못 받던 촌 구석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갈릴리 호수의 무식한 어부들과 인류 구원의 사역을 시작 했다. 그가 보기에 그렇게 발현된 진리와 구원에 대한 영적 여정은 제도화된 종교 권력의 테두리 안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현대 종교는 자본의 전략에 포섭되어 있습니다. 흡사 프랜차이즈 분점 내듯 늘어가는 교회의 모습은 시장주의의 전형처럼 보이고, 몸집 불리는 데에 급급한 대형교회는 이 시대 욕망의 바벨탑입니다.”

그는 승려 시인으로 등단했고 환속한 후에도 역시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독재에 항거하는 현실 참여 속에서 그는 기독교인과 기독교를 만났다. 함석헌, 김재준, 문익환, 안병무 등 기라성 같은 기독교 사상가와 운동가들을 통해 예수의 얼굴을 보았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를 때 재판정에서도, 호송 차량 안에서도 우연히 라고만은 할 수 없게 문익환 목사는 항상 곁에 있었다.

“감옥에 있을 때 가장 좋아했던 성경 구절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였어요. 진리가 자유하게 한다는, 어법으로는 맞지 않는 이 말이 얼마나 단호하고 생명력 있게 들리던지...”

일제 하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 독재 치하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서 온 한국교회의 빛나는 전통을 부러워하던 시인은 점차 그 생명력을 잃어가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다.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서는 기독교 근본주의 또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며,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배타적인 근본주의를 극복하는 신앙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대담을 정리했다.

50대 만혼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아내를 생각하며 방송 출연 최초로 사랑의 시를 낭송하는 모습, 문익환 목사 모친 상가에 가서 상주인 문 목사와 함께 춤판을 벌였던 사연 등 우리가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뒷 모습들이 소개되는 ‘민족 시인 고은, 기독교를 말하다’. 제작진은 “기독교인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도 시인의 눈을 통해 시대와 문학, 종교와 진리에 대해 바라볼 수 있는 방송이 되길 바란다”는 제작의 변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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