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유관순 열사의 유언 中)

1919년 3•1만세운동에 동참하고, 동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이듬해인 1920년 만 17세의 나이로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95년. 자신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도 오히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인 것에 아쉬움을 토로한 유관순 열사. 하지만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가녀린 소녀는 작금 ‘건국훈장 3등급’이라는 초라한 대접을 받을 뿐, 역사 속 기억에서 잊혀 가고 있다.

이에 유관순 열사의 묘지가 있는 서울 용산구는 용산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용산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신 유관순 열사의 고귀한 나라사랑의 정신과 그 넋을 기리기 위한 사업을 전개했다.

동 구는 지난달 23일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에서 가진 유관순열사 추모비 제막식과 추모제에 이어, 유관순열사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이종래 위원장) 주관한 ‘유관순열사 추모 예술전’을 9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3일간의 일정으로 용산아트홀 전시장에서 열고 있다.

유관순열사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 자문위원이자 (사)대한민국공공미술협회 회장인 하정민씨가 기획한 이번 예술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를 비롯해 남녀노소 모두가 유관순 열사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통해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메아리치며 처절하게 숨을 거둔 만 17세 어린 소녀의 용기와 눈물을 닦아주고자 마련됐다.

안중근 의사 추모비건립과 추모예술제에 이어 가진 유관순 열사 추모비 건립과 추모예술제는 일본 패권주의와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의 때에 맞춰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열사와 의사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시도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또 애국지사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국민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가져다가 주었다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유관순열사 추모 예술전’에 앞서 하정민 회장과 박혜영 MC(매일경제 TV)의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에서는 성장현 용산구청장의 인사, 진영 국회의원(새누리당)의 축사, 박길준 용산구의회 의장의 축사, 하철경 회장(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축사, 이종래 위원장(유관순 열사 추모비 건립 추진위원회) 인사, 예원학교 3학년 문소현 학생의 기념 연주, 손철 시인의 ‘누나’라는 제목의 시낭송으로 마쳤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용산구를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민족운동과 애국운동을 벌인 열사와 의사들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추모비 제막과 추모제에 이어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 제막과 추모예술제는 이 같은 계획 아래 진행했다. 애국지사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온 국민이 가질 수 있도록 용산구를 애국지사들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고장으로 만드는데 모든 힘을 쏟겠다”면서,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 및 추모예술제는 시작에 불과하다. 100년, 500년이 지난 이후에도 우리의 후손들이 용산구를 찾아 3.1만세운동의 정신과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마음에서, 안중근 의사와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를 제막했다. 이것은 애국 열사들의 역사적인 재평가의 첫 출발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하정민 회장은 “유관순 열사의 순국 95주기를 기념하며 열리는 전시회에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화가들을 비롯해 청소년 및 아동 그리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학생들까지도 동참해 그날의 감동을 화폭에 담아 다시 한 번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보고자한다”면서, “유관순특별전과 초대작가전 그리고 청소년 및 아동전, 홀트학교전에 출품 해 주신 전시작가, 청소년, 아동 모두에게 감사하다. 우리 모두가 작품을 통해 유관순 열사가 95년 전에 남긴 고귀한 뜻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4월 1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했다.

1919년 3월 1일 당시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3•1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했고, 3월 5일 서울에서 일어난 학생단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이후 3월 13일 고향으로 내려가 3월 14일부터 3월 31일까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3월 31일에 메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같은 해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발발했고,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된다. 이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됐고, 유관순 열사는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다가 이후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결국 1919년 6월 30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료들을 격려했고, 모진 매와 고문에도 끝끝내 대한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되는 고문으로 그토록 목 놓아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했다.

1920년 10월 14일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스승과 동문들의 손에 의해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가진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1947년에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됐으며, 1951년에는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군의 열사로 선정돼,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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