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를 등 모든 종교가 정치와 밀착되어 성장해 왔다. 이것은 서구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서 종교의 정치권력과 밀착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종교는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호흡하며, 성장했다. 따라서 종교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정신을 변질시켰다. 오히려 종교가 정치권력의 위에 군림한 때도 있었다. 정치와 권력이 분리되지 않고서는 종교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한국 기독교는, 1930대 후반 일본제국주의의 황민화정책에 쉽게 동화되어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등 쉽게 무너졌다. 장로교회를 비롯한 감리교회 등 대부분의 교파들이 앞을 다투어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권력의 주변에서 온갖 혜택을 누렸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한국의 젊은 여성과 남성들을 황국의 신민으로써 정신대와 일본군 입대를 강요하는 연설을 하는 등 친일적인 행각을 서슴없이 벌였다. 또한 교인들이 낸 하나님의 헌금으로 일본군대의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잘못도 범했다.

이것은 선교초기 한국의 기독교가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 그리고 피압박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제 권력의 주변을 맴돌면서, 교회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이것은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선교사들 역시 실적 중심의 선교활동을 벌이기 위해서 일제와 타협을 선택했다.

한국기독교의 권력과 밀착은 해방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국교회가 자유당 이승만독재정권 아래서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도,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성장제일주의 이승만도재정권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장기이승만의 장기독재정권을 정당화시켜주었다. 심지어 권력의 주변을 맴돌던 유모목사, 양모목사 등 일부 기독교지도자들은 6.25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을 위한 기도회를 여는 등 씻을 수 없는 잘못을 범했다.

이들 역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사실은 김일성의 권력에 기대기 위한 술수에서 나왔다. 이같은 잘못은 박정희 장기집권과 전두환군사독재정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내세워 정치적으로 고난 받던 사람들에 대해 침묵했던 보수진영의 지도자들은,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 장기집권과 군사독재정권을 정당화 시켜 주었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인권운동과 평화통일운동, 에큐메니칼운동, 가난한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대변자였던 NCC 계열의 지도자들도, 문민정부와 참여정부의 권력에 깊숙이 개입,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가 정체성을 상실하고, 공교회로서의 정통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행스럽게도 일각에서 한국의 기독교가 권력의 주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경우, 이념적 갈등과 지역 간의 갈등, 그리고 보혁간의 대결로 인해 교회분열을 자초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선 것은 그래도 아직까지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진보적인 후보를 지지하는 교인들을 향해 좌파, 좌경, 용공분자로 매도, 교회에서 설자리를 빼앗아 버리고, 지역감장을 조장하는 일에 서슴없이 나서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권력의 주변에서 받은 혜택을 계속해서 누리기 위한 것과 문관하지 않다. 여기에 상처를 받은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또한 국민들은 교회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한국교회가 성서의 중심사상이며, 예수의 정신인 사랑과 초대교회의 신앙공동체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잃어버린 기독교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없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지도자들은, 이같은 목소리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에 앞서, 한국교회가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권력의 주변에서 어떠한 일들을 해 왔는가(?)를 먼저 뒤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를 가져야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공공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을 깨달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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