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고소고발이 난무한 한국교회를 향한 질타의 목소리가 높다. 교회 안에서 화해와 중재를 통한 갈등 극복보다 세상 법정에까지 손을 내밀어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는 입장이다. 상호 신뢰는 온데간데없고, 상대방을 향한 시기와 질투만 무성할 뿐이다. 한국교회를 향해 ‘화해의 종교’라 칭하지 않고, ‘분열과 갈등의 양산소’라고 지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가뜩이나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이에 한국교회가 자정능력을 되찾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교회 내에서 갈등을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성경대로 하라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고린도전서 6장 1절부터 8절 말씀에는 세상법정에 송사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서는 세상 법정으로 가느니 차라리 손해를 보고, 불의를 당하고 속는 편이 더 낫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한국교회 안에서는 세상법정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있다. 오히려 권력과 재물 등 세상적인 것에 눈이 멀어 조금의 손해를 보는 것도 참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당한만큼 돌려주려고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

실제로 강남의 모 교회는 예배당 신축을 둘러싼 공사비 의혹과 담임목사의 재정유용 의혹, 담임목사의 권한을 강화한 교회의 정관개정 의혹 등으로 논란이 일어 법적 다툼까지 비화됐다. 관악구에 위치한 또다른 교회도 후임 목사 청빙을 둘러싼 분쟁이 급기야 사회법정으로 치달았고, 1천여명의 성도수를 자랑하던 교회의 규모도 어느덧 100여명으로 줄어 상처만 남겼다. 이밖에도 담임목사가 교회 돈을 횡령했다는 의혹으로 인해 법정다툼을 벌인 모 교회도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갈려 맹렬하게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또 10여년이 지났지만 K교회도 둘로 갈려 예배를 따로 드리는 등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소모적인 다툼을 지속하고 있으며, H교회와 G교회도 원만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사회법정에까지 손을 벌려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처럼 사회법정까지 간 분쟁은 하나님이 보시기 좋지 않을뿐더러, 교회 자체적으로도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화해가 사라진 교회는 둘로 갈리어 찬반 대립의 장으로 변질되고, 성도들은 하나둘 정든 교회를 떠난다. 이러한 교회를 향한 세상의 돌팔매질은 심해진다. 그나마 문제가 해결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문제해결까지 걸리는 시간은 상상을 초월한다. 설령 우여곡절 속에 사회법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도 그 과정 속에서 성도들의 멍든 가슴은 평생 상처로 남는다. 결국 문제해결을 위해 손을 벌렸던 사회법정의 ‘심판의 칼날’이 오히려 교회를 무너지게 만드는 무서운 ‘단두대의 칼날’로 변해 되돌아온 셈이다.

욕망에 눈 멀어 교회법 테두리 벗어나 사회법정 노크
사회법 통한 문제해결은 결코 성경적일 수 없어


 
사회법정 왜 가나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까지 한국교회가 사회법정에 손을 벌리고 있는 데에는 세상적인 욕망에 눈이 멀어서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교회법의 테두리에서는 개인적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법의 힘까지 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법의 힘까지 빌리게 되는 교회분쟁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담임목사의 재정전횡에 있다. 교회의 외형적 규모가 커지면서 덩달아 교회재정도 커지게 됐고, 결국 욕망에 눈이 멀어 성도들이 낸 헌금에 손을 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한번 재물의 달콤함에 맛을 들인 목회자들은 계속해서 성도들의 헌금을 자신의 돈처럼 유용하고, 욕망의 늪에 빠져 급기야 교회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부분의 교회분쟁에 의한 송사는 여기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운영이 담임목사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도 교회분쟁을 부채질하고 있다. 담임목사의 독단적인 운영으로 인해 민주주의적인 의사구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비합리적인 불통의 의사구조가 정착되어 갈등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 안에서는 담임목사의 잘못을 눈감아주는 풍토가 자리 잡고 있다. 오히려 잘못을 지적하는 성도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할 정도다. 교회가 두 쪽으로 갈리어 서로를 향해 양보 없는 소송전을 벌이는 것이 이런 이유다.

더불어 오늘날 교회분쟁의 주된 요인으로 목회자의 자질부재도 한몫하고 있다. 최근 유독 많이 발생하는 성폭력, 폭력, 사기, 성추행 등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비윤리적인 범죄들이 여기에 속한다. 단지 신학교를 졸업했을 뿐, 목회자로서의 갖춰야할 인격과 도리가 성숙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문제들이다.

아울러 담임목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같은 성도들도 믿지 못하는 교인들의 마음도 교회분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특히 과거보다 엘리트 교인들이 많아진 작금의 한국교회 안에서는 담임목사의 말 한마디보다도 사회법의 결정을 더 신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 안에서는 담임목사가 성도들의 눈치를 잘 봐야 목회를 잘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송사우선주의가 판쳐

이처럼 한 교회를 잘 이끌어 가야할 담임목사의 그릇된 행태와 담임목사를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지식과 경제적 위치가 높다고 착각하는 성도들이 교회분쟁을 야기하는 원흉인 셈이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 큰 문제는 각종 분쟁이 발생했을 시 교회 내부적으로 슬기롭게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사회법의 힘을 빌려서라도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에 있다.

사실 작금의 한국교회에서 모든 송사를 가만히 따져보면 사회법까지 가지 않아도 해결될 일이 비일비재하다. 간단하게 당사자끼리 대화로 해결될 일을 일반 언론에 대서특필하면서까지 사회법으로 가져간다. 한국교회 이미지 실추와 관련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에만 목적을 두고 있다.

과거에는 모든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께 먼저 기도를 하고, 방법을 간구했다. 부득이하게 교회분쟁이 심화됐을 때에도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려 애섰다. 그만큼 교회가 사회법의 힘을 빌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굳이 사회법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각 교회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살펴보면 누가 얼마나 빨리 사회법의 문을 두드리는 지에만 관심이 있다. 각 교단 총회에서 내부적으로 사법제도를 구성하고 있지만, 여기에 불복하고 사회법정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다. 서로 입장이 상반된 당사자들끼리 교회법의 어떠한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승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형사상 각종 소송전이 전국교회에서 무려 1000여건이 넘는 것만 봐도 한국교회가 “사회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지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일부는 사회법의 판결이 오히려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나서기도 한다. 몇몇 대형교회에서는 자체적으로 법무팀을 꾸려 각종 송사에 대응하고 있으며, 대 언론을 향한 방패막이로도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그만큼 이제는 교회에서 사회법의 힘을 빌리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것이다.

믿고 신뢰하자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모습이 결코 한국교회에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입장이다. 이는 곧 한국교회의 선교활동에도 악영향을 줄 뿐 아니라, 장차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 사회법을 통한 문제해결은 절대 성경적이지 않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너무 쉽게 사회법의 힘을 빌리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교회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회법까지 가는 일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 분쟁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설령 분쟁이 발생했다고 해도 교회 내부적으로 교회법의 테두리 안에서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면 해결될 일을 자신의 고집과 편견, 아집으로 사회법까지 끌고 가는 모습에서 탈피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정해준 답을 쫓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과거 그랬듯이 송사에 앞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문제해결의 주도권을 넘겨야 한다. 될 수 있으면 사회법의 문을 두드리지 않아야 되겠지만, 혹시나 사회법의 문을 두드리더라도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최고의 방법이 사회법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아울러 각 교단에서도 산하 교회의 분쟁을 해결함에 있어 최대한 독립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고, 예외 없이 원칙과 기본을 지켜 나가야 한다.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원칙을 어겼을 때 분쟁이 시작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더불어 투명하고 공정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평소 친분이 있다거나 돈과 권력에 얽매여 정직하지 못한 결과를 도출해서는 안된다. 이는 교회분쟁을 해결하기는커녕, 또다른 분쟁을 야기시킨다. 작금의 교회에서 교단 재판국의 판결을 따르지 않고, 사회법으로 돌파구를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때문에 각 교단에서는 각 교회에서 믿고 신뢰할 수 있도록 정직한 판결을 내려야 하며, 최대한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덧붙여 모든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자정능력이 필요하다. 사실 교회 내 분쟁은 주로 목회자를 비롯한 지도자들에 의해 생기고 있다. 작금 사회법정으로 가는 갈등 대부분이 평신도들의 민사소송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교권다툼, 재정횡령 등으로 인한 것임을 아로새겨야 한다. 목회자들도 권위적인 생각을 버리고 오직 주의 종으로써의 역할을 다함에만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교회분쟁이 발생되지 않도록 상호 간 신뢰를 쌓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솔로몬의 판결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욱 좋은 일이다. 서로를 믿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목회자와 성도들은 세상적인 것에 목적을 두지 말고, 서로를 믿고 신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십자가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 더 이상 사회법의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된다.

유종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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