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의식 제로

 1919년 3월1일 기미년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지 74년이 됐다. 하지만 한국기독교가 풀지 못한 것들이 그대로 산재되어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황민화정책에 기독교지도자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등 배교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또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민국의 아들과 딸들을 팔아넘긴 것은 물론, 일제의 아시아침략전쟁을 정당화 해주는 죄를 저질렀다. 이 뿐만 아니라 역사왜곡에 대한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해방 68년을 맞았다.
 한국기독교는 선교초기 가난한 민중들을 개화시키는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일제의 탄압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탄압에 못이긴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일제에 굴복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까지 서슴치 않은 것이다. 3.1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지도자들도, 일제에 황민화정책에 굴복하고, 아시아침략전쟁을 정당화시켜주고, 군자금을 모아 일본군대에 보내는 등 대한민국의 역사 앞에 큰 죄를 지었다. 사가들이 민족대표 33인이 3.1만세운동의 주체가 아니다는 기록을 내놓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들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문은,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을 태화관에서 낭독하고 스스로 일경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연행되는 굴절된 역사를 만들었다. 사실 3.1만세운동은 사회적 약자여던 여성들과 유랑민, 농업농민, 학생들이 행동으로 옮긴 민족운동이며, 자주운동이다. 그리고 피압박민족의 민중운동이었다. 사가들이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도 역기에 있다.
 기층민중이 주체가 된 3.1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의 젊은이들과 기독농업농민, 기독여성 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지방의 교회를 중심으로 전국방방곡곡에서도 일어났다. 그것은 전국 교회 앞에 세워진 3.1만세운동의 기념비와 순교자탑이 증명해 주고 있다.
 1919년 음력 3월 1일 병천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처음 계획은, 감리교 공주선교부의 장로에 위해서 계획되었지만, 행동으로 옮긴 것은 유관순을 중심으로 한 기독여성과 장날을 맞아 병천 아우내 장터에 몰려온 농업농민이었다. 당시 18명이 즉사하고, 61명이 부상을 당했다. .
 제암교회에서 희생된 교인 대부분도 농업농민, 어린이, 그리고 부녀자였다. 한마디로 3.1운동의 주체가 지식인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3.1만세운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황해도 연안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일경의 발포로 총에 맞아 5명이 즉사했고, 함흥에서는 수 십 명이 일경이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대동군 완장시장에서는 즉사자만 43명, 부상자 20명이었다. 강서군에서는 즉사자 1명, 부상자 8명이었다.
 이러한 민족적 사건인 3.1운동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마디로 한국기독교 뿐만아니라 지식인들이 일본제국주의 앞에 굴복하는 사이, 가난한 기층민중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이름도, 빛도 없이 일본경찰과 헌병이 쏜 총에 맞아 희생을 당했다.
 또한 일본 헌병과 경찰의 눈을 피해 유리방황하던 백성들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입대, 무장투쟁을 벌였다. 한국교회는 성장제일주의와 맘몬사상에 빠진 나머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에 대해서 평가절하하고 있다. 또한 당시 친일분자들을 청산하지 못한 한국기독교는, 이들을 기독교의 지도자로 추앙하며, 교회성장에 급급하고 있다. 
 당시 황민화정책에 굴복한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우상숭배가 아닌 국민의식으로 생각하고, 신사참배에 참여 했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신사참배가 한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고, 일황을 위한 우상숭배였다는 것이다.
 신사참배는 평양 숭실전문 및 중학교, 숭의여학교 등 기독교학교들이 제일먼저 참여하기 시작해, 감리교, 남장로교 선교부, 조선예수교장로회 등이 차례로 무너졌다. 이런 가운데서 주기철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해 순교를 당했고, 전라도지방의 기독교학교인 광주의 숭일고를 비롯한 영흥중 등 5개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당했다. 아무튼 한국기독교는 3.1만세운동 74주년을 맞아 가난한 기독교인들이 주체가 된 독립운동사를 재평가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만이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가 다시 태어나는 거룩한 날을 맞이할 수 있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