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88세를 일기로 서거해 지난 26일 국가장으로 엄수되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 삼아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투신했던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 역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여야, 진보와 보수를 넘어 “민주주의 역사의 큰 별이 졌다”고 애도할 정도로 그가 남긴 족적은 깊고 뚜렷했다. 김 전 대통령 서거로 한국 정치사에 영욕을 남긴 ‘양김 시대’ ‘3김 시대’도 함께 막을 내렸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과 25세의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9선에 이르기까지 의회민주주의의 최일선에 섰다. 그러나 화려한 정치경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영광보다는 고난, 박해의 시간이 더 길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다 초산테러를 당했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80년 신군부 시절엔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며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험난했던 민주화 투쟁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1987년 민주화 항쟁을 이끌며 대통령직선제를 얻어냈지만 야권후보단일화에 실패, 김대중 김종필 3김이 모두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 낙선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책임론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3당 합당이라는 현실적인 선택을 통해 정치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대통령이 꿈이었던 그는 마침내 3당 합당을 통해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가 문민 대통령으로서 한 첫 번째 일은 군대 내 고질적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척결한 일이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신군부의 핵심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냄으로써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등식을 최초로 깨기도 했다. 이후 개혁 강공드라이브를 펼쳐 금융실명제, 부동산거래실명제 실시 등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고 정경유착 등 부패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이런 치적에도 불구하고 방만한 기업 운영, 부실한 금융·외환관리는 임기 말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국가부도 사태를 초래하게 된다.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즐기며 전직 대통령에 비해 몸에 밴 청렴성으로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그는 임기말년에 ‘제2의 국치’로 기억될 IMF사태에 대한 책임과 측근비리로 아들까지 감옥에 보내야 했던 혹독한 정치역정으로 인해 쓸쓸히 퇴장해야 했다.

충현교회 장로를 지낸 그는 1987년 대통령선거 유세 때 기독교 인사들에게 “청와대에 찬송가 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가 타종교로부터 역풍을 맞고 고배를 마셨다. 그 후 92년 대선 때는 연설 말미에 ‘하나님께 감사를 올린다’는 구절을 빼지 말라는 기독교계 주문을 거절하기도 했다. 청와대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아예 출석하던 충현교회에 발길을 끊고 가족끼리만 따로 예배를 드렸다. 무엇보다 청와대의 불교신자 모임인 청불회를 허용함으로써 기독교를 배신했다는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는 별세하기 얼마 전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듯 가족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불쑥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직접 성경 이사야 41장 10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는 말씀도 외웠다고 한다.

이제 이 시대 정치 거목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유언처럼 남긴 딱 두 마디 ‘통합 화합’은 고질적 분파주의에 빠진 정치계와 기독교계 모두에게 숙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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