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깃줄로 칭칭 동여매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 몰라라’하고 있는 교회가 그렇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의미가 담긴 성탄절로 분위기를 전환해야 한다. 그 중심에 교회가 서야 한다. 세상과의 담을 쌓고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지 말고,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지는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세상이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면,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더 이상 예수의 탄생이 상품화되지 않도록 이정표를 제시해야 한다.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성탄절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이 땅에 어둠과 혼란을 걷어내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이 땅의 소외된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에 옮기면 된다. 해마다 이맘때쯤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올해에는 IS로 인해 국제적으로도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은 해였다. 지금도 시리아 등에서는 죄 없는 민간인들이 연합군의 보복폭격과 IS의 악행으로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는 가난과 굶주림으로 하루도 연명하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국내에서도 소년소녀가장을 비롯해 독거노인, 미혼모 등 소외된 이웃들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아기 예수의 탄생만을 교회에서 축하한다고 진정한 성탄절이 될 수 없다. 진심으로 교회가 소외된 이웃들을 향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가설 때 비로소 아기 예수의 탄생이 빛이 나는 것이다. 또 바닥으로 떨어진 교회의 이미지 제고와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교회의 부흥성장에도 희망을 볼 수 있다.

성탄헌금 낭비하지 말자

그렇다면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성탄절은 어떻게 준비하면 될까. 가장 쉬운 방법은 성탄절 헌금을 뜻 깊은 곳에 사용하는 것이다. 호화로운 성탄절 예배를 준비하기 위한 예산을 낭비하기보다, 최소한의 경비로 예배를 드리고 그 남은 것은 전부 세계의 고난당하는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교회는 사회를 향한 나눔과 섬김보다는 철저하게 성장주의에 빠져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했다. 수많은 절기의 헌금을 제대로 사용하기보다는 큰 행사를 치르기 위한 노잣돈으로만 생각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성탄헌금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모든 헌금을 교회건축을 위한 자본금으로 사용한 교회들도 많다. 하지만 이는 곧 교회를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아닌, 비판과 개혁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 년 중 이 때만큼이라도 ‘교회’라는 개인보다 ‘이웃’이라는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동포를 비롯해 난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헌금을 사용할 때 비로소 교회가 이 땅의 희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괜히 다른데 낭비하지 말고, 이 땅에 우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함을 주고,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곧 교회를 버린다는 말처럼 한국교회는 성탄절을 맞아 세상을 구하려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갈릴리에 오신 예수가 문둥병자, 혈우병자, 정신병자, 창녀, 고아, 과부, 힘없는 어린이, 어부, 농민, 세리들과 함께 했듯이 교회도 전 세계의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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