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대부분 민족적인 구원을 위해 교회로 몰려 들어
한민족 문제인 통일문제 끌어안고 기도하는 모습 보여야


한국교회여! 역사 앞에 회개하라

현재 한국교회의 교인은 700만 명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이단사이비로 정죄한 정파의 교인 200만명을 포함시킨 수치이다. 한국개신교는 1960년도부터 1980년도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한국개신교의 성장은 크게 선교초기와, 해방이후부터 60년도, 박정희정권 아래서의 고도 경제성장과 맞물린 교회성장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초기의 한국개신교의 성장은 기독교 선교 역사상 이레적인 성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민족적 위기에 기인된 것이었다. 한국의 민족은 유순한 종교성, 병리적 폭발, 서양화 추세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선교와 복음주의 문제들은 그대로 노출되었다.

선교 초기부터 1919년까지 교회성장의 요인은 민족적인 또 개인적인 구원동기가 크게 작용했다. 이 때 한국은 민족적 주권과 사회•정치•경제적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그 상황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침략, 특히 일본의 침략과 서양 자본주의의 팽창주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급속한 교회성장의 물결은 1895년에 나타났다. 이에 앞선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과 서양세력에 대항하여 일어났으며, 봉건적 계급사회에 대한 대항이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은 청국을 끌어들였다. 그 다음 청국과 일본은 한국 지배를 위한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이는 결국 청일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일본의 승리는 나라를 온통 뒤 흔들어 놓았다. 청국의 패배는 윤리관, 사회질서, 종교적 신념, 가치체계 등 한국의 전통적 가치체계들을 붕괴시켜 버렸다.(1986년 한길사, 박순경박사저 <민족통일과 기독교>)

이것은 또 중국 왕족의 붕괴를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이미 일본은 서양의 기술문명을 받아들이고, 성공했다. 이 서양 기술문명의 힘으로 한국을 침략하고, 서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렇게 민족적 위기에 처하자, 한국의 백성들은, 개인적인, 민족적인 구원을 얻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 당시 한국 백성은 서양문명과의 접촉에 있어서 교회가 유일한 창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적인 위기가 교회성장의 요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의해서 민족의 주권이 박탈당하면서, 선교사들은 조선의 주권회복을 위해서 의식화교육을 뒤로하고,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 때 교인의 수는 배가되었다. 1905년부터 1910년의 기간은 한국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였다. 한국 땅에서 일어났던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1905년도에 끝났다. 여기에 힘을 입어 일본에 의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처해야만 교회가 성장하고, 헌금이 많이 나온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일본이 승리하도록 배후에서 재정적,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을사보호조약은 일본 수상 가쯔라와 미국 루즈벨트의 밀사인 태프트 사이의 비밀스러운 관계, 즉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묵인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승인할 것이다”라는 밀약이 이를 뒷받침 해 주고 있다.

1910년 한일합방, 한국이 침몰하면서 한국의 민족은 민족적인, 개인적인 구원을 찾기 위해 교회로 몰려들었다. 이 때 교회로 몰려든 한국의 백성들은 일본에 대항하는 민족적 저항운동의 선봉에 있었으며, 복음을 통한 구원의 영적 의미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민족해방운동과 불가분리적으로 결부되어 있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역사 앞에서 그나마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해 민족구원의 불씨를 남긴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정교분리 원칙 한국통치를 정당화

문제는, 선교초기 한국민족을 지도하고, 영적 리더의 역할을 했던 영미선교사들의 태도이다. 이들은 한민족 독립투쟁 기간 동안, 내내 정치적 중립, 불간섭을 원칙을 주장하며, 한민족의 아픔에 대해 ‘나 몰라라’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사실상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 해주고,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의 모습 속에서 정치적 중립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들 영미선교사들은 오히려 조선의 백성들을 미개하고, 천박한 백성으로 치부하고, 일본에 대해서 선진국가로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의 지지성명까지 발표했다. 한마디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편에 서서 이를 합리화시켰다. 장로교 선교사인 게일이 한국민족운동에 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에서, 이는 극명해진다.

“자기 나름대로 광기가 휩쓸고 있다… 자살, 자해, 맹렬한 맹세들, 게릴라식 봉기와 냉혈적인 저항이 만연한다…”

또한 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은 장로교의 선교사들보다 한발 더 나아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관리들에게 매우 우호적이며, 일본식민지 세력에게 협조적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의 정치적 중립의 원칙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위한 정치적 행동을 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국 북장로교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은 자신의 저서 <극동의 지배>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선교사들은 언제나 한국인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모든 노력을 동원했다. 만일 선교사들의 그러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교회에 의해서 주도된 혁명이 한국의 몰락시기에 폭발 했을 수도 있다. 일본 통감과의 만족스런 관계들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합법적인 정치에 복종하도록 또 존중하도록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한국 민중의 일본화를 좋은 신앙으로서 수납해야 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구원의 동기는 선교사들의 정치적 중립과 달랐다. 민족구원을 위하여 교회를 찾았던 많은 한국인들이 선교사들의 태도에 실망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났다. 그들은 한마디로 서양 제국주의와 상업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적 지배자의 신학, 식민주의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거부했다. 이는 1910년도부터 1940년까지 교회의 성장속도가 완만해진 사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통한 민족구원의 길을 찾았다. 특히 민족의 어머니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기도했다. 이 결실은 3.1만세운동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의 주체는, 민족의 어머니인 기독여성, 억압받던 기독농민, 도시에 유학 갔다가 동맹휴업으로 귀경한 학생들이었다. 실질적으로 총칼이 나부낀 만세운동의 현장에는 민족대표 33인은 없었다. 이 운동은 기층민중에 의해서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일부 선교사들은 일본의 잔혹함을 목격하고, 동요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개별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성을 세계에 알렸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백성에 대한 동정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행동으로 민족구원에 투신

최소한 영미의 선교사들은 한국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복음으로 무장하여 불의한 세력인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싸우라고 메시지를 전달했어야 했다. 이에 반해 그들은 교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만 늘어놓고, 되레 복종하도록 설득했다. 그것은 친일적인 한국인 교회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태도를 비판하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민족해방운동이 등장했다. 그들은 새로운 맥락에서 서양의 상업자본주의에 결탁하고, 식민지세력을 도와주는 기독교와 기독교선교를 비판했다. 한국기독교가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가 다양한 사회적 봉사사업들을 수행했지만, 사회적, 정치적, 국제적, 민족적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지는 못했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의 국가주의에 굴복하고,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하나님 앞에서 배교행위의 범죄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상업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길들여진 영미교회들을 비판하며, 일본제국의 세계침략을 정당화 해 주었다. 또한 교회를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편입시키는 잘못도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모습이며, 역사이다.

하지만 민족적인 구원을 기독교에서 찾았던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앙의지를 고백했다. 그러나 이들은 서양의 정통보수신앙에 길들여져 버린 목사와 선교사들에 의해서 정죄되었다.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듯이 한국교회는 여전히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유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 구원의 영성이 민족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와 유리되어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민족과 역사,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

이렇게 민족과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서슴지 않았던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교인들과는 상관없이 분열과 갈등을 일삼았다. 특히 장로교에 의해서 찬송가가 분열되었고, 공과가 장로교 단독으로 발행되었다. 민족구원과,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하나님의 성령역사를 증언해야 할 교회가 분열을 일삼으며, 일본제국주의에 아부하기에 바빴다. 일부 기독교 인사들은 한국의 젊은 여성과 청년들을 향해 정신대와 일본군에 입대 할 것을 연설하고 다녔다. 이 뿐만 아니라 교회의 ‘종’을 일본의 세계침략을 위한 전쟁 물자로 내놓았으며, 어떤 목사는 군용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참 부끄럽다. 해방이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백성들을 위해 일해야 할 교회가, 식민지 협력세력과 신사참배 거부 세력 간에 다툼으로 또다시 분열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또 자유주의 신학자와 정통보수주의 신학자 간의 갈등도 파생되어 결국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굴레가 되었다.

특히 한국교회 교인 아니 한국민족은 미국을 한국 민족의 해방자로서 신뢰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당시 한국 민족은 세계 지배구조에 대해서 무지했다. 기독교의 반공사상은 전적으로 미국 편이 되도록 이끌었다. 이것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이승만 정권 아래서 기독교인들은 특권을 향유했다.(1986년 한길사, 박순경박사저 <민족통일과 기독교>)

이것은 분단 70년, 광복 70년이 지난 현재에도 고착화되어, 민족통일을 이야기 하는 국민들을 향해 ‘용공’, ‘좌경’으로 매도하는 편당을 만들었다. 또한 독재정권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되어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이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잘못을 범했다. 또한 바벨문화와 맘몬에 길들여진 목회자와 교인들은 자본주의와 결탁,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말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매일 쏟아내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민족, 그리고 역사 앞에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겠다는 한국교회의 의지이며,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작은 불씨를 남겨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다. 또한 민족구원을 갈등하는 한국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광복이라는 기쁨을 한국백성에게 주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새로운 역사의 창조를 위해, 민족의 문제이며, 민족의 소원인 한민족의 통일과 한민족의 선교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것만이 교회를 떠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깨어난 지식인들을 교회에 붙잡아 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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