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되는 세상

70-80년대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이제 교회의 십자가가 서지 않은 곳이 없다. 교회당은 커피숍만큼이나 흔해졌다. 70-80년대 교회는 다방하나가 오픈하면, 교회도 하나 세워졌다고 말 할 정도였다. 그리고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당도 동네마다 세워졌다.

문제는 작은 교회들이 2000년도를 정점으로 교회성장이 멈추면서, 문을 닫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교회들이 하나님나라 선교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고, 작은 교회들이 대형교회들에게 잡아먹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학교를 졸업하는 목사후보생들이 사역할 교회당이 줄어들고, 교회가 대형화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70-80년대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그리고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며, 전도자원을 만들어 낸 결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가 부자들의 종교로 변질되고, 교회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면서, 교회는 본질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정체성도 상실했다. 화려한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 곳에 예수가 오기를 기다리는 꼴이 되었다. 한마디로 교회의 담을 넘어 예수가 있는 곳을 찾지 않았다. 그 결과 교회의 신도수는 제자리에 멈춰 있을 수밖에 없게 됐다.

오늘 “교회가 본래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머리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토대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웠다.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빼면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마다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교인들에게 강력히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는 부자들의 종교로 변질된 나머지 말을 앞세우고,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이지를 않고 있다. 그것은 분명 교회당에 그리스도를 가두어 놓고, 그리스도가 있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예수님은 죄인들과 사귀고,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리고 “세리와 창녀가 의로운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한마디로 성경은 서로 다르고, 지위와 신분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귀고 나누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 장애인, 떠돌이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행동하는 교회가 없다.

사교집단으로 변질된 현대교회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전도자원을 고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학벌이나,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집단으로 변질됐다. 교회 내에서도 학벌과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가 하면, 교회를 사유화시키는 경향이 짙다. 오늘 교회 내부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분쟁과 다툼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의 문턱은 높아져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나올 수 없는 곳이 바로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또한 예수님은 항상 잃어버린 자와 소외된 자를 찾아 나섰다. 그것은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가 잘 대변하고 있다.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비유이다.

오늘 사람들은 흔히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며, 어리석은 사랑이다. 한 사람을 버릴 수 있는 공동체는 백사람도 버릴 수 있다. 한사람의 아픔에 대해 동정하지 않는 공동체는 생명을 다한 공동체이다. 사회의 성숙도는 소외된 사람, 무능한 사람, 병신, 떠돌이들을 얼마나 잘 돌보느냐에 따라 측정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잃어버리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야 할 때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고통 속에 있다. 이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이 구원을 받는다. 교회는 잃은 자에 대한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사랑의 공동체이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이 식은 교회, 자기들 가운데 안주하는 교회는 닫힌 교회이며, 생명을 다한 교회이다.

모든 인류의 평등을 위해 행동하는 교회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고, 그 믿음을 통하여 하늘에서 이루어야 한다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절규의 기도를 드렸다.

그렇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헌신한 이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데서 기쁨과 보람, 그리고 생명과 사랑이 흘러넘치는 사랑과 평등의 공동체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주도권을 잡으러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교회를 파괴하는 적그리스도이다. 오늘 종로5가를 활보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정치적인 목사, 예수를 시멘트 속에 가두는 현대교회, 강단에서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무당목사 등등이 바로 그들이다.

교회는 우리의 뜻과 정성을 드리고, 우리의 몸까지 바치는 곳이다.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곳이다. 삶의 원천이며, 목적인 하나님에게 거룩하게 예배드리는 곳이다. 이런 자세로 교회에 나가는 참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 오늘 세속화된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은 냉철하게 현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만,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할 수 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종이든, 자유인이든 성령으로 한 몸이 되어 모두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초대교회는 이런 원칙을 잘 지켰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한 덩어리로 잘 어울려 살았다. 한마디로 하나님나라운동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로마제국시대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교황 심플리키우스는 수입의 1/4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쓰도록 규정했다. 심플리우스에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에 이르기까지 귀족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고리대금 행위를 철저하게 반대하며, 투쟁했다. 고대와 중세에는 고리대금 행위가 가장 중요한 수탈의 방법이었다.

이렇게 교회가 선한사업을 위해서 활동했던 과거의 모습을 오늘 한국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르만 민족교회는 여기에 기초해서 교회법과 시민법을 만들었다. 로마제국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도,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향한 교회의 실천적인 봉사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세상 권력과 결탁하면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부자가 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다. 처음 한국에 들어온 교회들도, 영미선교사들이 말한 것처럼 가난하고, 천박하고 미개한 백성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생명의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적인 교회로 전환하라

구약시대, 신약시대에는 철저하게 공동체적인 신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구약성서는 개인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중해 있다. 신약성서에서도 교인들은 개인들로서 부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즉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았다.

분명한 것은 복잡하고 거대한 산업사회에서의 개인주의적 형태의 교회는 적합지 않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결속을 다져야 한다. 다양한 선교기관과 단체, 교회들이 서로 협력하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교회를 옮겨 놓아야 한다. 그 곳에는 예수님께서 의로운 하나님 나라에 먼저 갈 사람들을 예비해 놓았다. 즉 고아, 창녀, 세리, 병신, 떠돌이, 갇힌 자들이 있는 곳이다. 그래야만 선교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고,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편 한국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운동을 위한 선교하는 교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또한 목회자 중심의 권위주의적인 교회형태에서 벗어나 평신도 중심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민족의 아픔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하며,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 창조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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