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재 민 목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재수’ 또는 ‘운’이란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다. 그래서 구원으로부터 기도의 응답 그리고 뜻하지 않게 잘 된 경우를 망라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란 단어로 대신한다. 그러나 재수나 운이라 해야 할 상황을 은혜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은혜를 폄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길에서 돈을 주웠다. 그건 재수인 것이다. 누군가 잃어버리고 애 태우고 있는 것을 주워 은혜,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 한다면 마귀들이 실소(失笑)할 따름이다. 대게의 경우 재수와 운 그리고 은혜에 대하여 흰색과 하얀색, 휴대폰과 핸드폰처럼 생각한다. 혹자는 재수와 운 그리고 은혜를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과 안다니는 사람의 표현 차이일 뿐이라 하기도 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은혜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은혜는 재수나 운 따위완 전혀 다른 것이다. 똑 같은 그릇 두 개에 하나는 독, 하나는 약을 담았다. 어떤 것으로도 구분 되지 않는 둘 중 하나를 집었는데 약이다. 이것은 운이었다. 두 번째 또 약을 집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은혜는 항상 약을 집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혹여 독을 집어도 (막16:18) 그대로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 은혜인 것이다. 사전적으로 재수(財數)는 재물에 관한 것이고, 운(運)은 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한 인생에게 이미 정하여져 바꿀 수 없는, 흔히 말하는 ‘팔자’가 그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놈의 8자는 이리 놓아도 8, 저리 놓아도 8인 것이, 바로 놓던, 뒤집어 놓던 절대 안 바뀐다. 고전에서 말하는 ‘팔자(八字)’의 복잡한 정리보다 8자로 푸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것 같다. 기억할 것은 ‘은혜는 팔자도 바꾼다’는 것이다.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앉은뱅이, 걸인이 생각난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그가 40여년(행4:22)을 그렇게 살아오며 그것을 자기 팔자로 맹신했을 것이 뻔하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니 일어서서 걷고 뛰게 된 것이다.

그의 삶은 ‘앉은뱅이’에서 ‘예수증인’으로 바꾸어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었다.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노아는 어떻게 홍수에서 살아남았을까(?) 9절 말씀처럼 “그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까. 그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9절보다 먼저인 8절, 노아의 스토리를 시작하는 첫 구절은 “노아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는 새로운 인류의 주인공에 대한 대전제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은혜의 후예로, 지금도 은혜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의 찬양을 힘차게 불러보자네’

파주영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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