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의 현장에 33인은 없었다.

피식민지 민족주의에 입각해 민족사•세계사적인 의의를 새롭게 조명해야
영미선교사 대부분 한국민족의 아픔 몰각, 피압박민족의 자발적 독립운동

3.1만세운동의 의의 몰각, 친일파 득세

3.1만세운동은 교회사적, 민족사적 큰 의미가 있다. 3.1만세운동은, 선교사들의 선교가 민족의 현장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었고,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이 존속되어 왔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사였다. 무엇보다도 3.1만세운동이 피식민지의 민족주의에 입각해 있었다는 사실은 서양의 자유주의와 식민주의와는 다르게 해석되고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오늘 3.1절 기념행사는 행사를 위한 행사에 맞추어져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3.1운동을 계기로 해서 일어난 기독교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은 천도교보다도 기독교가 동원력에 있어 매우 컸다. 초기에 체포된 1만9천여명중 기독교인은 3천3백73명(17%)이었다. 참여수는 1천2백회중 3백40회(주동세력이 뚜렷한 경우), 기독교는 78지역서, 천도교는 66지역서, 양자 공동으로 42지역서 주도됐다. 당시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3%으로 추산한다면, 기독교가 선교사들과 무관하게 민족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이 땅의 여성들에게 주목해야 한다. 당시 한국교회는 남성들에 비교해서 여성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남성지배체제에서의 억압의 굴레에 갇혀 있던 여성들이, 자신의 해방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에 관여했다는 점이다. 서울에서 수천명, 전국에서 1만여명의 여학생들이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기생을 비롯한 기독여성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해 희생을 당했다.

이들 중 체포되어 기소된 자들이 587명이었으며,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129명이었다. 이들은 거의 기독여성이었다. 이화학당에서만 28명이 검거되어 유관순을 비롯한 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배화, 호수돈, 숭의여학교 등의 기독교학교에서 여학생들이 대거 참여했고, 여성 민족운동가들이 속출했다. 또한 여기에는 기생을 비롯하여 보부상, 백정, 떠돌이들이 참여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분명 한국교회는 선교초기 이들을 향해 복음이 전해진 만큼, 은폐된 이들의 역사를 발굴하는 작업에 나서야 하는 것은 물론, 이들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3.1만세운동은 민족운동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시점부터 지금까지 서양의 근대문명과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피억압민족의 해방이라는 출발점과 과제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억압세력의 영향권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특히 기독교 민족운동이 그러했다. 그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피식민지인 다수가 유럽인들, 미국인들을 선망하고, 자신의 민족을 방치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결국 친서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운동의 분열로 이어졌으며, 많은 지식인 민족주의자들이 일본 식민지세력에 힘없이 넘어졌다. 오늘 한국교회가 영미의 보수주의 신학과 신앙이 최고인 것처럼 고집하는 이유도, 영미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이데올로기적인 신학과 신앙 그리고 선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친서양적인 민족의식은 결국 처음부터 자기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또 1938년 총독부 주도의 조선기독교연합회 조직의 명분론이 되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제3세계국가의 선교에 있어 시행착오를 일으키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에 2번 열린 선교사와 일본 관헌들의 회의에서, 독립운동 진압을 위한 선교사들의 협조가 요청되었다. 일본인 법무대신은, 이 자리에서 선교사들에게 ‘당신들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만일 당신들의 노력을 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일에 기울인다면, 당신들은 많은 봉사를 하는 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들은 인류와 평화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고 반강제적인 협력을 요청했다.

이 요청에 모펫(숭실학교 교장), 에비슨(연희전문 교장), 웰치(감리교 감독), 노블은 정치적인 중립의 입장에서 일본 식민지통치를 전제한 ‘통치완화’를 건의했다. 그리고 정의가 물질적인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크게 한국인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를 주장했다. 이것은 물질적 착취를 몰각한 추상적인 편견에 불과했다. 이들이 말하는 정의와 자유는 일본 식민지 통치세력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는데 우리는 당시 선교사들의 태도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수 없다.

선교사들은 기본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한국민족의 절규를 듣지 못했다. 에비슨은 오히려 1924년 귀국시 “조선인은 일본지배 아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위자들이 불신자였으며, 선교사들의 정치적 중립 때문에 3.1운동에 개입할 수 없었다고 기독교 민족운동을 과소평가했다.(박순경박사 <기독교와 민족통일> 한길사)

분명 선교사 대부분은 일본의 총칼에 의한 한국인 탄압을 자국의 선교보고에서, 변명하는 일에 바빴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웰치감독 같은 선교사는 한국인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을 죄로 치부하기도 했다. 애무선도(愛撫善導)를 필요로 하는 동포로 취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가 피압박민족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교사의 이같은 태도는 오늘 목회자들의 입에서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말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3.1운동의 중심에 창녀, 떠돌이, 백정도

그럼에도 3.1만세운동을 목격한 일본 지배자세력은 성난 조선민중들의 ‘조선의 독립’과 민족운동에 대한 열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3.1만세운동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일본지배세력은 문화정치와 조선인 동화정책을 펼쳤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쉽게 동화되었으며, 민족주의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국내의 친일인사들은 신일본주의를 표방하고, 일본 중의원에 의원선거법의 조선 시행을 청원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한국협회장 민원식은 1921년 동경호텔에 머물다가 양근환 청년에 의해 살해되었다. 일본 중의원은 민원식의 암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지배자의 세력들이, 친일적인 인사라 하더라도 한국인의 참정권을 허락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국민협회는 해마다 제국의회가 개원되면, 참정권 허용을 건의해 왔다. 그리고 정당 혹은 요로에 건의백서를 제출하는 등 꾸준히 참정권 허용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이 운동은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일본군 지원병제 실시에 이어, 징병제까지 실시하게 되면서 참정권의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1944년 ‘외지동포에 대한 처우 개선’의 내용이 발표됐다. 1945년 3월 귀족의원, 중의원 관계법이 개정되고 조선인 7명이 귀족의원에 선출됐으며, 23명의 중의원을 선거에 의해 선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은 결국 패망했다. 귀족의원은 김명식, 박상준, 박중양, 송종헌, 윤치호, 지진용, 박상룡 등이다.

국민협회는 여기에 감사해서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윤치호, 김명준, 이성근이 바로 그들이며, 이들은 일본의 처우개선에 감사해서 ‘처우개선과 각오’라는 표제로 신도실천을 맹세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민관에서 처우개선 총궐기 전진대회를 가졌다.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허락한 것은 패색이 농후한 일제가 조선청년들을 더 많이 전선의 총알받이로 몰겠다는 회유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육군지원법령이 공포된 것은 1938년이었다.

조선인에 의한 지원병제는 이보다 수년전에 일부 친일파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제기되어왔다. 대변사인 박춘금은 일본 국회에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왔으며, 그후 친일인사들에 의해 건의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 지원병제가 참정권의 문제와 관련 있다고 하여, 일단중지시켰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선이 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조선인 지원병제도를 재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다 친일파들은 지원병제도의 조속한 실시를 일제당국에 건의했다. 그 중심에 깡패이면서 2번에 거쳐 일본 국회의원을 지낸 박춘금을 비롯하여 조병상, 원지사, 한규복, 윤치호, 이광수 등이 있었다.
일제는 국민협회 후원아래 지원병문제, 참정권문제, 의무교육문제 등을 의제로 재경유지들의 간담회를 열 준비를 서두르는 것을 기회로 일제는 마침내 조선인의 지원병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일본 국회의원이었던 박춘금의 역할이 컸다.

한국의 친일세력은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한국의 젊은이들을 일본군 총알받이로 내 몰았다. 이 때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들은 앞을 다투어 조선의 청년들과 학생들을 향해 일본군에 입대해서 황국의 신민으로서 임무를 다할 것을 연설하고 다녔다. 또한 여성지도자들은 젊은 여성들을 향해 정신대로 나갈 것도 강요하며, 강연회를 열었다.

윤치호를 비롯한 박희도, 정춘수, 양주삼 등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여기에 적극 지지하고 나섰으며, 교회당의 종을 떼어 일제의 전쟁 놀음에 헌납하기도 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박희도는 조선의 청년, 학생들을 향해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하고 다녔으며, 양주삼은 신사참배의 결의를 애국적인 발로이며, 국가의식이라고 자진해서 전국교회에 참여를 권유하는 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일제 앞에 굴복하는 한국교회

일제 36년 한국교회는 조선의 민족개화를 위해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것은 그만큼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11년 105인 사건, 1919년 3.1만세운동이 바로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1936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어난 일제의 황민화 교육정책과 문화정치란 미명아래 일어난 신사참배 강요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고, 하나님 앞에 배교하는 신앙양심을 유린하는 종교적 박해였다. 이것은 한국백성의 수난이었으며, 이 때를 기독교의 수난시대라고 사가들은 전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신사참배는 큰 수난이었으며, 고통이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의식, 국민의례라고 강변했다. 일부 일제의 앞잡이 종교인들도 신사참배가 종교행사가 아니므로 참배한다는데 구애받지 말고, 우선 학교나, 교회를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며, 자신의 신앙양심과 배교행위를 정당화 했다. 신사참배는 분명 종교의식이었으며, 종교적 양심상 허용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신사참배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3.1만세운동 당시보다도 더 큰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교역자와 교인들은 이런 생각에서 신사참배를 절대 반대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신사참배는 배교행위이며, 민족정신을 고수하는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절대로 굴복할 수 없는 요구였다. 일제는 1931년부터 조선인들에게 점차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미션스쿨 계통의 학교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2년 일제는 평양에서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각급학교 참석을 요구했다. 기독교학교는 교리에 어긋난다고 참석을 거부했다. 그러자 일제는 국민의례만 참석해도 좋다고 통보했다. 여기에 숭실전문과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가 넘어갔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멈추지 않앗다. 마침내 일제는 신사참배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먼저 국공립학교에 명령을 내렸고, 총독은 전국지사와 경찰부장, 경찰서장 회의를 소집해 신사참배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불응하는 학교장은 교장직에서 물러나게 했고, 그래도 불응하면 학교를 폐쇄키로 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숭실전문학교 교장인 ‘맥쿤’이 교장 인가를 취소당했으며, 숭의여학교 스노우 교장도 해임 당했다. 그러나 안식교회를 비롯한 천주교회, 감리교회 등은 일제의 명령에 쉽게 굴복했다. 따라서 이들 학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것은 당시 미국 남장로교 외지 선교국 총무 ‘폴틴 아이비’가 신사참배가 종교행위라고 논증을 폈기 때문이다. ‘폴턴’은 일본 태생으로 일본의 제반사정을 잘 알고, 신사의 본질과 내용을 잘 알고 있는 학자형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시국이 긴박해지자 총독부는 시국 인식철저에 관한 통첩을 발하고, 매일 1일을 애국일로 정해 각급학교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시행토록 했다. 여기에 불응한 광주의 숭일학교, 수피아여중, 목포의 영흥중학, 정명여중이 폐교 당했다. 순천의 매산학교, 전주의 신흥학교, 기전영중 등이 자진 폐교했으며, 군산 영명하교 등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의 10개학교가 나중에 모두 폐교됐다.

그후 평양의 숭실전문, 숭실중학, 숭실여중도 폐교원을 제출했으며, 대구의 개성, 신명, 재령의 명신학교, 선천의 신성학교, 보성, 강계의 영실학교, 서울의 경신, 정신고여 등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1938년 2월까지 신사불참배의 이유로 기독교계 학교를 폐교시킨 총독부는 여세를 몰아 교회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회유와 강압의 악랄한 수단을 썼다. 여기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일제의 강압과 회유정책에 넘어갔다. 1938년 9월9일 장로교 총회를 최후로 신사에 굴복함으로 한국교회는, 씻을 수 없는 범죄를 하나님 앞에 저질렀다. 또한 한국교회는 신앙의 자유와 신앙의 양심을 일제에 유린당했다.

신사참배는 하나님을 배반한 배교행위 임에 틀림없다. 장로교 평양노회는 1938년 2월9일 최초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고, 실시했다. 뒤이어 동년 9월9일 장로교 총회가 개회될 때까지 전국 23개 노회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신사참배, 하나님께 배교행위

총독부는 친일기관지인 ‘평양기독교친목회’가 제공하는 정보와 건의에 따라 전국장로교가 신사참배를 시행토록 하기 위해 기독교친목회가 꾸민 각본대로 평양, 평서, 안주노회의 대표를 불러 신사참배 결행안을 제안, 동의, 제창토록 하는 각본을 꾸몄다. 그리고 내약을 받았다. 1백여명의 고위경관과 수십명의 무술경관 포위 속에서 시작된 장로교 총회는 서기의 성명서 낭독과 친목회원의 신사참배 즉시 실행의 긴급동의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당시 신사참배를 반대한 선교사들의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당시 평양노회장 박응률은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32명을 대표해서 “신사참배는 일본국민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성명서를 제출하고, 평서, 안안노회 노회원들의 제청을 받아냈다. 블레어를 비롯한 황해노회 장흥진, 빌 등의 선교사는 장로교 헌법에 위배된다며, 반대 결의문을 총회제출했다. 그러나 일경의 압력에 의해서 상정조차 못했다. 이날 부회장 김창길의 안내로 평양신사를 참배했다.

감리교는 이에 앞서 9월3일 총리사 양주삼의 이름으로 신사참배 결행의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감리교는 천주교회와 함께 일제에 자진 굴복했다. 여기에서 한발 더나가 한국교회는 일본교회의 보조에 맞춰 내선교도 일체라는 명분을 내걸고, 기독교 내선일체, 황국신민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하나님께 배교행위를 범했으며, 민족 앞에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송건호 <한국현대사> 신학연구소)

이는 곧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여기에는 일인들도 참여했다. 동연합회는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하나가 되었다. 이 연합회에 솔선해서 참여한 한국측 인물은 정춘수를 비롯하여 김우현, 차재명, 구자옥, 김종우, 원익상, 장홍범, 윤치호, 이명직, 윤치호, 김활란, 신흥우, 오경선, 유옥겸, 이동욱, 함태영, 황종진 등이다.

이밖에도 김활란은 애국여자단을 조직, 조선의 여성들에게 정신대로 나갈 것을 강연하고 다녔으며, 정춘수를 비롯한 기독교지도자들은 청년들을 향해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강연했다. 또 이들은 교회의 종을 떼어 전쟁물자로 내놓았으며, 일본군 전쟁물자를 위한 헌금도 아낌없이 드렸다. 지도자들 중 개인적으로 항공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일제의 문화정치에 쉽게 동화

이밖에도 기독교청연회를 비롯한 문인단체들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문화정치, 동화정치에 굴복했다. 여기에는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로 해석하고, 황국신민으로 당연한 의무임을 강조했다. 이것도 모자라 한국의 기독교세력은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찬송가와 공과를 분열시켰으며, 일본 제국에 붙어 6개의 재단법인을 허가 받았다. 이런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가 지금도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예수님을 호화로운 교회당, 시멘트 건물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교회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야 한다. 3.1만세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아픔이 있는 곳으로 나갔듯이 말이다.

특히 지식인 대부분은 일제의 폭악에 대해서 세가지 반응을 보였다. 하나는 민족적 양심은 살아 있으나, 저항할 용기가 없는 자이고, 다음은 일제에 아부하며, 권력의 주변을 맴돈 자이다. 3.1운동이후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이 길을 택했다. 마지막으로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민족적 양심을 지킨 파이다. 이들 중 한파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다가 형무소에 갖고, 한파는 완전히 세속을 떠나 은둔생활을 했다.

8.15 해방이 4-5년만 빨리 왔어도, 지도층 인사들이 친일파라는 비난을 듣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가의 말은 사실을 모르고 한 말이다. 친일파는 한일합방 이전부터 있었으며, 지금도 친일파의 활동은 멈추지를 않고 있다. 일본군국주의 부활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정신대문제 등이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는데도, 친일세력들의 참담하고 쓰레기 같은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또한 일본차들이 거리를 질주하며, 97년전 이 땅에서 일어난 3.1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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