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으로, 수난주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주간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주간으로 절제된 생활을 해야 하는 시기다. 목회자들은 금식 등 자기절제와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성도들도 나태해진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기도로써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입성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 한국교회에서 고난주간의 의미는 조금은 퇴색된 듯하다. 부활주일은 잘 지키지만, 고난주간을 지킴에 있어 아쉬운 점이 많다. 절제와 경건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세속적인 유혹에 너무 빠져 있다. 겉모습만 봐서는 사순절을 온전히 지키는 목회자와 성도인지 의심이 갈 정도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사순절(?)

안타까운 것은 누구보다 사순절을 온전히 섬기고, 경건과 절제의 본을 보여야할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사순절 기간임에도 각종 크고 작은 이벤트성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이 행사들이 열리는 장소가 하나같이 호화로운 호텔이라는 점도 얼마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경건하지 못한 사순절을 보내는지 뒷받침하고 있다.

최근 WEA의 세계지도자대회가 롯데호텔서울에서 열린 것은 이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 90여명의 전 세계 복음주의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대한민국을 찾았다. 국내에서도 한기총을 중심으로 내로라하는 지도자급 목회자들이 열과 성을 다해 행사에 동참했다. 그동안 서로 앙숙이었던 교단들도 이번만큼은 친근감을 뽐내며, 대회의 성공을 빌어주기 바빴다. 의도됐던 그렇지 않던 화합의 장이 됐다.

물론 이번 대회가 기독교적 일치를 촉진시키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국제적 정체성, 목소리, 플랫폼을 제공한다는 의미로써 환영받을 만 하다. 또 위기에 처한 남북한 관계를 바라보고 매일 세계 수백만명의 복음주의자들이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남북한 국민들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의지를 관철시킨 것도 좋았다.

하지만 과연 사순절 기간에 그것도 대형호텔에서 대회를 꼭 열었어야 하느냐는 문제다. 혹자는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좋아하실까 되묻고 싶다. 단순히 책망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것이다. 오히려 대형호텔에 쏟아 부은 돈을 오히려 선한 일에 사용했으면 하나님께서는 더할 것 없이 기뻐하셨을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지도자급 목회자들의 처사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이번 대회에서 내놓은 결과물이라는 것이 생각보다는 미약해 아쉬움도 컸다. 제아무리 포럼의 성격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밝힌 메시지에서는 실질적인 대안이나 해법보다, 한반도 정세가 이러하니 우리 모두 기도하자는 두루뭉술한 내용뿐이었다.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 호화로운 대회를 열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속빈 강정이었다. 그들이 말을 한대로 단순한 모임 성격이었다면 최고급 호텔에서 대회를 몇날며칠 치를 필요가 없었고, 만약 대회가 중요도가 컸다면 적어도 한반도 정세에 영향력을 줄만한 대안을 제시했어야 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사순절 기간에 많은 돈을 쏟아 부은 이번 대회를 두고, 비난의 목소리를 면치 못할 것이다.

신실한 성도들은 사순절 기간 내내 보다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즐기는 여행이나 취미생활까지 자제하며 근신한다. 끝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로나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은혜를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1년 중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성경을 애독하고 기도에 열중하며, 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전도에 열과 성을 쏟는다.

이를 보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른다. 과연 지도자급 목회자들이 사순절에 경건과 절제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단에서 떠들었던 자신의 말을 어떻게 책임질지 걱정이다. 성도들에게는 경건과 절제를 외치고 정작 본인들은 호화로운 호텔에서 외식하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확실한 것은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절제된 생활을 하고, 거룩함과 경건함 속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된 예배라는 점이다.

스마트 폰에 중독된 크리스천

시대가 변함에 따라 미디어의 발달도 빨라졌다. 그중에서도 스마트 폰 중독은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작금의 세상에서는 저마다 손에 스마트 폰을 들고 다니며, 세상의 온갖 정보를 탐닉한다. 이 작은 스마트 폰은 어지간한 컴퓨터에 버금갈 정도로 성능이 뛰어나 손 안의 컴퓨터라고 불릴 정도다. 하지만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단점도 있듯이 그 중독성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국민 모두 이 작은 미디어 열풍에 열병을 앓고 있다.

문제는 미디어 중독이 세상 사람들만의 걱정이 아니라, 한국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목회자나 성도나 구분 없이 모두가 TV, 라디오, 인터넷, 스마트 폰 등 각종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다. 성경책 대신 스마트 폰 앱으로 대체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할 말 다했다. 한국교회도 더 이상 미디어 홍수시대에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이는 성도들의 주일일과를 따라가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시끄러운 스마트 폰 알람에 눈을 떠 본인도 모르게 TV 리모컨을 찾고, 동시에 밤사이 새로운 뉴스거리는 없는지 스마트 폰을 매만진다. 이어 라디오 음악에 맞춰 씻고, 차려진 밥상에 앉아 또다시 스마트 폰을 탐구한다. 거실에는 TV가 혼자 떠들어 대고, 이내 옷을 입은 성도는 성경책 대신 어플이 설치된 스마트 폰을 들고, 스마트하게 교회로 향한다. 교회에 도착해서도 간단한 인사 몇 마디를 던진 뒤 이내 인터넷을 통해 각종 정보를 캐낸다. 주위의 유초등부 아이들도 손에서 스마트 폰을 내려놓지 않는다. 고사리보다도 작은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작거린다. 교회는 정성스럽게 출석하지만, 단순히 도장만 찍을 뿐 스마트 폰에 더욱 빠져 있다. 이쯤 되면 미디어가 유익을 가져오기보다는 유해매체로 전락한 셈이다. 말 그대로 스마트 폰에 한국교회 전체가 중독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고난주간만큼이라도 미디어에 속박된 자신을 뒤돌아보고, 미디어 금식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성이 있다. 이는 성인들만 할 것이 아니라, 유초등부 아이들도 동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제 자라나는 아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까맣게 잊고, 온종일 스마트 폰 게임에만 몰두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 말로만 해서는 효과가 없다. 무엇보다 부모가 먼저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본인 자신은 스마트 폰에 빠져 있는 모순적인 행동을 삼가야 한다.

그 시간에 성경을 정독하는 모습을 보이고, 책을 읽는 등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고난주간만큼이라도 TV 오락프로그램을 보면서 웃고 떠드는 일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고난주간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매사에 절제와 경건의 자세를 몸소 실천에 옮겨야 한다. 아이들에게 부모만큼 위대한 스승이 없다고 할 정도로, 부모의 모습 하나하나가 아이들에게는 거울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은 고난주간에 아이들이 잘못된 모습을 따라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고난주간 미디어에 얽매인 성도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이유인 것이다.

나눔은 선택이 아닌 필수

고난주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눔 운동을 펼치는 기간으로 정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이 땅에 진정 고난당하는 이웃들이 꿈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사랑실천 운동에 매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국 교회에서 하루 한 끼 금식 모금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 소외된 이웃들에게 건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각 사회복지 시설 등에 낮은 자들과 소통하며, 그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간단하게는 교회 앞거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고난주간만큼이라도 자가용으로 교회를 방문하기보다 걸어서 방문하는 등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노력도 괜찮은 방법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한국교회의 도움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혹한의 추위에 거리 곳곳에 떨고 있는 노숙자가 있고, 불의에 항거하다 감옥에 갇힌 양심수가 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병든 몸을 이끌고 하루에 몇 천원 벌이 넝마주이 어르신도 있으며, 대기업의 갑질에 슬픔 받는 을의 인생들도 있다. 무엇보다 힘 있고 가진 자들 중심으로 짜인 잘못된 사회구조에 항거하며 쓰러져간 희생자들이 한국교회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끌어들여 하나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림을 그려줘야 할 대상이 바로 한국교회인 것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미사여구가 가득한 말만 앞세우거나, 값싼 동정이나 몇 마디 위로의 빈말을 보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라면 당연히 말없이 행하는 자기희생 정신을 보여야 한다. 나에게 차고 넘치는 것을 나눔에 있어 인색하거나, 생색내기용으로 한다면 의미가 없다.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은 사랑이 위선이 되듯이 아무리 선행이라도 자신의 이익창출을 위한 행동이라면 결코 따뜻한 사랑이 아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위선덩어린 셈이다. 교회는 고난주간이 아니라도 ‘사랑의 실천’에 절대 인색해서는 안 된다. 이는 곧 멈춰버린 한국교회 부흥의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2016년 고난주간은 목회자가 목회자답게, 성도는 성도답게 거듭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특히 이 땅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하는 한국교회로 성장하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활용하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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