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재 민 목사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일체를 복음이라 한다. 그럼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하신 것도 복음인가! 복음은, ‘福音’인 것이다. 태평양 저편 사람들은 그것을 ‘Good News’라 하고, 우리는 기쁜 소식, 복된 소리라 한다. 그렇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오면 쉬게 하겠다”(마11:28) 정도 되어야 복음이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을 어찌 복음이라 할 것인가! 사람이 무언가를 지고 다닌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를 들쳐 업은 후, 물동이에 담은 빨랫감을 이고 동네에 하나뿐인 샘터까지 오 가신 이은 어머니이었기에 가능했다. 남자들이 군 생활 중 지고 다니는 한말 무게의 ‘군장’은 아무리 피 끓는 청춘의 때라도 당장 벗어 던지고 싶은 것이다.

그럴진대 무게조차 가늠할 수 없는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복음 아니라’고 하는 것이 진솔해 보일 듯하다. 그런데 그것 십자가가 복음인 이유가 있다.

십자가는 B.C 2000년 경의 고대 바빌론 제국 때부터 장구한 세월 동안 흉악범의 형틀이었다. 땡볕아래에 산채로 매달아 말려 죽인 후, 시신을 수습하지 않아 먼저 간 이들의 해골이 언덕을 이룬 처형장에서, 두려움과 고통 중에 죽어가야 하는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과 가문 대대에 수치가 될 추악한 죄인의 몫이었던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신 것이다.

그 순간부터 십자가는 죄인의 형틀이란 오명을 벗었다. 부끄럽고, 두렵고, 저주 받은 최악의 도구인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쓰시니까 구원의 표상이요. 최고의 선물이고, 최상의 자랑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면 최악이 최상 되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복음인 이유이다.

지금 당신이 최악이라면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청하라! 하나님께서 쓰시면 마른 뼈도 군대를 이룬 것을 기필코 믿으시라.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려 다 포기 했어도 하나님께서 쓰시니 죽음조차 누르지 못한 엘리야를 잊지 말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이삭이 그랬다. 야곱이 그랬고, 요셉도 그랬다. 다 꼽기엔 지면이 부족할 뿐이다. 그들이 최악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최상으로 만드신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 복음화의 기수가 된 바울은 최악에서 최상이 되는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디아서 6장 14절)”고 고백하며, 자신의 안과 밖 모든 것을 그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고, 엄청난 사람 ‘사울’을 버리고 보잘 것 없는 ‘바울’을 자처한 것이다.

이제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과 세상의 문화 전반에서 마귀를 쫓는 유일한 상징이 되어 있다. 2016년의 사순절이 중반을 지나는 이 때, 최악도 하나님이 쓰시면 최상 됨을 기억하고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자.

파주 영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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