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재 민 목사
정수, 꼼수, 악수, 허수, 강수, 묘수, 변칙수, 함정수, 자충수, 무리수, 승부수 등은 바둑용어이면서 일상에도 쓰인다.

나열된 것들 중 하나님의 방법에 어울리는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 ‘정수’인 것이다. 죄의 값은 생명(롬6:23)이기에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하심이 없다”(히9:22)하신 수순을 진행하심에 친히 육신으로 오셔서 죄의 결과를 뒤집어쓰신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나에게 조금의 능력이나 권한이 있다면 분명 꼼수나 변칙수를 찾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뜻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그리하지 않으신다. ‘모든 죄 사하노라’는 말씀 한 마디로 끝내실 수도 있으신 창조의 주인께서 십자가를 택하셨으니 그것은 공의로 행하신 바른 수단 곧 ‘正手(정수)’인 것이다.

암몬과의 전장에 나갈 때 승리를 기원하며 인신제사를 서원했던 ‘입다’, 삿11:3에서 그의 기질을 엿볼 수 있겠으나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 앞에 인신제사라니! 그것을 막으려면 하나님의 군대가 패해야 할 것인데, 한 사람 때문에 물꼬를 돌리지 않으신 하나님의 방법은 ‘입다’의 무남독녀였다. 그런즉 하나님의 방법은 정수이며, 그 正手는 하나님의 공의가 출발점인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수순이 우리를 향한 사랑에 초점 되었어도 그 공의에 합당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신앙을 영위함에 있어 철저히 정수를 두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일에도 ‘왕도는 없다’는 것이 진리일진대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야! 그럼에도 우린 자꾸만 정수가 아닌 다른 수를 찾는다. 신앙생활의 正手, 그것은 주일을 지키는 것이다.(출20:8外)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마23:23外). 전도하는 것이다(행1:8外). 이는 누가 뭐래도 예수 믿는 사람의 ‘바른 수(正手)’인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변칙수를 찾는 아쉬움이 크다.

예수님의 핵심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이니 그것이 복음의 정수인 것이다. 그럼에도 주일을 성수하지 않고,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성도에게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교세가 줄어들까’ 하는 것에서 비롯된 변칙수임을 고백한다.

그러다보니 현실 앞에서 찾는 것이 바로 ‘묘수’일 것인데 그것은 대게 ‘꼼수’로 전락한다. 예수님을 넘겨주고 손을 씻으며 자신의 묘수에 감탄했을 빌라도는, 성경 밖에 있는 우리가 자기의 꼼수를 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경계할 것은, 때로 내가 발견한 기가 막힌 묘수가 자충수가 되는 것이다.

마27:62이하에 혹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주검을 훔친 후 생전의 말씀을 근거로 선동할 것을 대비하려는 기득층 나름의 묘수가 나온다. 이때도 빌라도는 묘수인지 꼼수인지를 택하며 기득층의 경비병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인봉하고 굳게 지켰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빼도 박도 못할 사실로 인정하게 되는 자충수였다. 차라리 지키지 않았다면 사기극으로 몰 여지라도 있을 것을, 이젠 누가 뭐래도 그 자리에 경비를 섰던 이들은 부활에 대한 산 증인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마귀의 함정수다. 기억할 것은 그 어떤 수도 정수 앞에는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갖은 함정수로 흔들어도 따박 따박 정수로 받으며 반집을 남기는 이가 ‘기가 막히다’는 찬사와 함께 ‘고수’라는 칭호를 받아간다. 그렇게 正手는 ‘고수(高手)’만 둘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린 ‘영적 고수’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셨는데, 나는 “지나가게 하옵소서”에서 머물러 있다. 예수님이 우리 자리에 머물렀다면 ‘부활’은 없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기 원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인 ‘正手’를 두어갈 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파주 영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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