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 당한’ 자의 부활
부활절을 맞았지만 죽임 당한 자들의 피의 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셨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억울한 ‘죽임’을 당하셨다. 그의 피 값으로 우리 모두는 그의 죽음과 부활하심을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을 약속받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들여다보면 여기저기 죽임 당한 자들의 한의 소리가 들끓고 있다. 꽃다운 어린 생명을 차가운 바다 속에 내던진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위안부로 끌려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받은 일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한의 눈물’도 아직까지 마를 줄 모른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나아가 세계 전체는 전쟁과 테러의 위협 속에서 수많은 생명이 희생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는 탐욕에 길들여진 가진 자들에 의해 수많은 아이들이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우리들이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 봐야 할 때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고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의 계절을 맞았지만,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십자가의 형틀에 못 박고 있지는 않은가.

따라서 우리는 죽임을 당한 십자가에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역사적 사건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죽임’ 당하는 생명이 세계 도처에 널려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가 참된 부활 신앙을 가슴에 품고 담대하고 용기 있게 세상 속으로 나아가 생명의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각각의 종교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가 서로 다르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는 ‘죽임’의 종교이며, 십자가의 종교이다.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종교이다. 한국의 민중신학 주창자인 안병무 목사는 “유교는 주검, 불교는 죽음, 기독교는 죽임의 종교”라고 했다.

이 말은 죽음에 대한 각 종교의 시각을 말해 준다. 유교는 시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죽은 자에 대한 예절을 중요하게 여긴다. 유교는 죽은 조상에게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성으로 장례와 제사를 드린다. 죽은 자에게 정성을 다하다 보니까 장례와 제사 절차가 복잡해졌다.

불교는 죽음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자 한다. 죽음이란 것이 애초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해탈하는 것이다. 불교는 도를 잘 닦아서 속세의 인연을 끊고 깨끗하고 반듯하게 해탈하고 열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가 무너졌다. 죽음이 무섭지 않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가장 근간이자 핵심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죽음이 아니라 ‘죽임’에 관심을 갖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들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흙에서 왔으니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다. 문제는 이런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 일어난다.

기독교는 비정상적인 죽음에 관심을 갖고 그 억울한 죽음에 저항한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고 있다고 말씀하셨고,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해 내셨다.

기독교가 비정상적인 죽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불의한 권력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기독교는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갖으려고 한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죽임의 세력에 저항하는 종교이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죽이는 세력과 살리는 힘에 관심을 둔다. 따라서 죽이는 힘에 대한 저항과 극복이 과제로 된다. 이는 자연히 사회 역사 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라 말하는 것도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 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 누구든지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가.

△견고한 부활신앙에 서라
우리는 본래 부활 신앙이 ‘죽임 당한 자’의 부활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본래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이었다. 예수님도 악한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무덤에 갇혀 있지 않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이 부활 신앙이 그저 소망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몸소 보이셨다.

초대 교회의 제자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는 구세주(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라는 증거는 주님의 부활이었다. 이 복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었던가. 성서의 증언과 주님의 부활에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신앙 선배들의 증거이다. 우리 선배들의 그 고난과 죽임의 역사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을 지탱해왔던 신앙의 핵심에 주님의 부활과 우리들의 새 생명에 대한 고백이 있다.

우리는 오늘 기독교 역사에서 순교함으로써 신앙을 지켰던 선조들과 같은 자세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목숨을 걸고 주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은 열리는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안주하는 사람은 부활의 마당에 합당하지 않다.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당하신 주님과 같은 마음과 자세로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을 살 때에 부활의 문은 열리는 것이다. 분명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자의 부활이다.

또한 견고하게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죽음과 부활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하고 확고하게 믿지 않으면 삶 전체가 흔들린다. 우리 삶을 독침처럼 쏘는 죽음을 확실하게 이기는 부활의 신앙에 든든히 서지 못하면, 인생의 분명한 방향을 잃어버린다.

우리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불안에 뒤덮인다. 반대로 이 세상 한번으로 어차피 끝나는 삶이니, 마음껏 즐겨보자는 쾌락주의로 빠지는 사람들도 많다. 현대 문화가 생명의 문화로 승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을 상실한 시대의 절망은 현실 도피적 쾌락주의로 변질한다. 주님을 믿고 부활 신앙에 견고하게 서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어떤 불안이나 공포에서도 웃을 수 있다. 어떤 세상의 쾌락과 유혹 앞에서도 담대히 이길 수 있다.

△세상 속 ‘죽임’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라
‘죽임’ 당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이 세상 속 무수한 고난의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 세상 속에는 억울한 ‘죽임’이 난무하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 속에서 무수한 생명들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속의 모습이다.

오늘날 세상을 보라.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때려죽이는 잔인무도한 사건들이 온통 언론 지상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기근과 가난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 폭탄 자살 테러가 무차별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자행되어지고 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가치는 사라지고 목적을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이 같은 흉악무도한 범죄의 중심에 기독교인이, 목사가 있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자신의 친 딸을 때려죽이고 방 안에 수 개월간 방치한 목사가 구속돼 충격을 줬다. 누구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야 할 목회자가 귀한 생명을, 그것도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는 엄청난 범죄를 자행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억울한 ‘죽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의 권세를 깨치고 다시 부활하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전 세계 도처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든 생명을 끌어안고 이들을 보듬어 안아야 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하며 회개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부활절 현장을 보면 ‘죽임’ 당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교세를 과시하고 뽐내기 위한 일회성 행사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그 사건을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더 십자가에 매달고 피를 흘리도록 하는 무리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그 무리가 바로 지도자를 자처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목회자들과 사회 곳곳 고난의 현장은 외면한 채 이기심에만 가득 찬 우리 자신은 아닌가.

부활절 아침, 우리 모두 자신을 돌아보자.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십자가의 형틀에 못 박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의 피의 절규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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