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재 민 목사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요11장에서 만나는 나사로, 무덤에 있은 지 나흘 된 사람이 살아나서 수의를 걸친 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는데, 그의 누이들은 그와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마지막이 33세였던 예수님을 기준하면 나사로의 누이들은 처자(處子)일 텐데, 그 여린 아가씨들이 아무리 오누이라 해도 완전히 죽었던 오빠와 같은 지붕 아래서 밤에 잠을 잘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예수님 운명의 순간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들이 마을에 나타나서 ‘여보게, 나 10년 전에 자네가 묻어준 아무개야’, ‘여보, 지난달에 당신이 날 묻으면서 흘리던 눈물을 보며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깨달았소’하고 돌아다니면 마27:52이하의 그 동네는 도대체 어찌 되는 걸까?

웃긴 발상이지만 성경은 문학이 아닌 ‘Documentary’이기에 짚고 갈 만하다. 또한 성경이 생략한 뒷얘기 같지만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신령한 몸”(고전15)이란 메시지를 전할 때 “누가 묻기를 …”(고전15:35)로 시작한 것을 볼 때, 나 마냥 엉뚱한 질문 해 댄 이들도 있었을 법하다.

‘신령한 몸’, 그것은 ‘육신의 부활’에 비하면 훨씬 합리적인 듯하다.

‘육신 그대로 부활 한다’하면 ‘미친놈’이라 직설할 사람도 ‘영으로의 변화’를 말하면 설득의 여지가 있겠다. 하지만 말씀엔 짝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신령한 몸’이 마22:30의 예수님 말씀이 근거 된다면, 요11:25 外에서도 예수님 친히 ‘우리 몸 그대로의 부활’로 받을 만한 말씀을 주고 계시고, 기록대로라면 마27:53은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그럼에도 지성과 정보가 넘쳐 이성(理性)이 확고하고, 과학과 의술이 어느 때보다 발달한 현시대는 하나님의 역사 앞에 아주 자연스럽게 합리적이 된다.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에 인색해지고 그런류의 전도자를 도외시하거나 이상한 눈으로 본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지극히 합리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다.

아니 그것은 머문 것이 아니고 퇴락하는 것일 수 있다는 긴장을 가져야 한다.

돌을 맞지 않으려 진리의 말을 아끼는 종들, 세상으로부터 좋은 소리 들으려 몸부림치는 교회들, 그보다는 무식한 신앙으로 치부되는 옛 신앙이 그리운 건 낭만이 아닌 것이다.

식사기도 20분, 설교 3시간이 자랑이던 시절, 그리스도인의 절대 화두는 ‘육신의 부활’이었던 걸 기억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모여 앉으면 ‘육신의 부활’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고, 그즈음 유행처럼 번지던 ‘화장(火葬)’은 “예수 믿는 사람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입을 모으던 어른들 생각이 난다. 나 정도가 ‘육신의 부활’을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인류의 공감을 확보하기 위한 합리적인 것에 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롬8:32에서 보듯 성경은 지극히 합리적이지만, 신앙이 이치와 논리에 합리(合理)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사상이나 철학일 뿐 더 이상 신앙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머리는 말씀이 들어올 때 “그러 한가” 상고(詳考) 할 수 있도록 얼음장 같이 냉철해야 한다. 반면 가슴은 뭐든 녹일 수 있는 용광로가 되어 “마른 뼈들이 큰 군대 됨”에 ‘아멘’ 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머리까지 뜨거우면 이만희가 예수 되고, 가슴까지 차가우면 사두개인 될 것이다.

“죽은 자의 소망이 부활”(행23:6)이기에, 부활은 모든 육신의 소망이다.

하지만 요11:4은 부활이 재생(再生)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임을 말씀한다.

전능자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육신의 부활’쯤 이야!

요11:40은 그것이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밝히신다.

파주 영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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